빈혈

빈혈이 심하네요. 항암치료도 좋은데, 우선 피주사 좀 맞고 합시다.

피주사요?

. 이렇게 빈혈이 심하면 기운 없어서 안되요.

꼭 피주사를 맞아야 하나요?

아직까지도 수혈을 받자고 하면, 왠지 모르게 찝찝해 하며 거부감을 표시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뉴스에서 수혈받고 나서 몹쓸 병에 걸린 것을 인상 깊게 본 탓이다.

피주사 맞았다가 에이즈 걸릴까봐 그러세요? 지금 빈혈 수치가 6밖에 안되요. 보통 정상 사람은 12이상인데, 6밖에 없으니 남들 보다 피가 절반밖에 없는 상황이라구요.

그래서 이럴 때는 보통 숫자를 들먹거리면서 빈혈이 얼마나 심한지를 이야기 하여 환자분을 설득하게 된다. 엄밀하게 빈혈수치가 6이라고 해서 정확히 피가 절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들은 그냥 이렇게 이해해도 무방하다.

어때요? 피주사 맞으니까 훨씬 낫죠?

네 피주사 맞으니 다음 날부터 기운이 훨씬 나던데요. 진작 맞을걸 그랬나봐요. 선생님 고맙습니다.

내과의사로 살면서 명의가 되는 순간은 사실 많지 않은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이렇게 수혈로 증상이 좋아지는 경우이다. 심한 빈혈 환자가 심한 피로감, 숨참, 입맛없음 등의 증상을 호소하다가도 피주사만 맞으면 다음날부터 정말 드라마틱하게 증상이 좋아진다.

빈혈은 원래 貧血 즉 피에 가난이 든다라는 뜻이다. 정상인에 비해 적혈구(rbc)가 모자라는 병이 바로 빈혈이고, 빈혈은 간단한 피검사를 통해 헤모글로빈(Hb)이라는 수치만 보면 진단할 수 있다.

빈혈은 항암치료의 직접적인 부작용이라기 보다 간접적인 부작용이라고 보는 편이 맞을지 모른다. 항암치료로 인해 일시적으로 골수 기능이 저하되지만, 수명이 짧은 백혈구와 달리 수명이 긴 (120일 정도 된다) 적혈구는 항암치료를 받는다고 바로 줄어들지는 않는다. 물론 항암제가 누적되거나, 암이 오래되면 빈혈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암환자들 중에서는 위장관출혈이 동반되어 있는 경우가 있어 빈혈이 더 잘 생긴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이론들이 있지만, 암환자에서의 빈혈은 만성병에 동반된 빈혈 (ACD, anemia of chronic disease)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며, 적혈구 생성인자 (EPO, erythropoietin)이 모자라서 적혈구가 잘 안만들어진다고 여겨진다.

그래서 암환자에서의 빈혈 치료는 EPO를 인슐린 주사 맞듯이 피하 주사로 맞는 것이 주를 이룬다. 빈혈수치가 너무 낮은 경우에는 EPO를 주고 빈혈수치가 좋아지기까지 시간이 걸리므로 피주사(수혈)을 통해 빨리 빈혈수치를 교정하게 된다.

의사마다 조금씩 견해가 다르긴 하지만, 빈혈수치 (Hb)는 적어도 9-10정도는 유지 하는 것이 좋다. 담당의사가 빈혈이 있으니 EPO를 맞거나, 피주사를 맞자고 한다면, 전혀 주저할 필요 없이 담당의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좋다. 빈혈은 항암치료 도중 간과되기 쉽지만, 의사도 환자도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환자의 삶의 질을 쉽게 높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