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으로] 암, 이제는 산다 … 10년 생존율 59%
대장암 4년, 암을 동무처럼 대하는 이해인 수녀

이해인 수녀는 맑고 고운 시어로 만인에게 행복과 희망을 전한다. 그런 그에게 암이 찾아왔지만 암의 고통까지 행복지수를 끌어올리는 쪽으로 승화시켰다. 수녀님이 지난달 부산을 찾은 취재진에게 빨간 산다화(동백꽃)를 건넸다. [부산=오종택 기자]

수녀님을 만나기로 한 시간은 오후 2시였다. 착오가 있어 두 시간이나 늦게 지난달 23일 오후 4시에 부산 광안리 바닷가 수녀원을 찾았다. 그녀는 붉은 산다화를 내밀었다. 매우 예뻐서 선물로 꺾어 왔다며. 산다화는 동백꽃의 다른 이름이다. 이해인(67) 수녀는 산다화처럼 그윽한 미소로 취재진을 맞았다. 약속 시간에 늦은 미안함 따위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희끗희끗한 앞머리가 살짝 보였지만 세월이 비켜간 얼굴이었다. 그 어디에도 암이라는 흉측한 놈의 그림자는 없어 보였다.

 수녀님 시의 산실인 해인글방에서 마주 앉았다.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새긴 미니 병풍, 아이돌그룹 ‘동방신기’와 함께 찍은 사진 등이 눈에 들어온다. 수녀님은 1970년 등단 이후 맑고 고운 시어로 행복과 희망을 노래해 왔다. 그런 그에게 대장암(직장암)이라니….

 수녀님은 그동안 투병 과정을 공개한 적이 없다. 전화로, e-메일로 설득했다. 주변 지인에게 부탁도 했다. 수차례 시도 끝에 어렵게 말문을 열게 하는 데 성공했다. “다른 암 환자랑 다를 게 없는데 괜히 요란스러워 보이잖아요.” 인터뷰를 거절한 이유다.

 수녀님에게 암이 찾아온 것은 2008년 여름이다. 그해 6월 중순 어느 성당에서 강의를 끝내고 화장실에 갔다가 진땀이 나고 장이 꽉 막혔다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 달 서울성모병원에서 대장암(직장암) 3기 진단을 받고 수술했다. 50년 구도자(求道者)의 길을 걸어온 수녀님도 암이 두려웠을까.

 “검사를 할 때만 해도 몸에 조금 이상이 있을 정도지 암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진전된 암(3기)으로 판정이 났어요. 일단 놀랍고 조금은 두려웠지요. 암은 다른 사람이 걸리는 걸로 알았는데…. 세상과 작별하는 연습을 서둘러 구체적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

당시 병원에서의 한 장면.

“생존율이 얼마나 되나요.”(이해인)

“하늘에 계신 분만 알지 누가 알겠습니까.”(주치의)

이 말을 듣고 주치의에게 모든 걸 맡겼다. 장을 수십㎝ 잘라냈다. 일주일에 5번, 총 6차례에 걸쳐 30번의 항암 주사를 맞았고 방사선 치료를 28번 받았다. 약을 2년 정도 먹었다. 본인이 힘든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이 힘들어할까 봐 자신에게 더 엄격해졌다. 도 닦는 마음으로 조금이라도 먹으려 애썼다. 누룽지라도 말아 먹었다.

 누굴 원망하랴. 운동 안 하고 튀김이나 밀가루 음식을 좋아한 내 탓이지. 평소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는데 암에 걸리면서 그런 생각이 더 깊어졌고 하루하루가 기적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많이 아플 때

꼭 하루씩만 살기로 했다

몸이 많이 아플 때

꼭 한순간씩만 살기로 했다

고마운 것만 기억하고

사랑한 일만 떠올리며

어떤 경우에도 남의 탓을 안 하기로 했다’

이해인의 시 ‘어떤 결심’


 수녀님은 ‘남수단의 천사’ 고(故) 이태석 신부를 떠올린다. 암을 겪다 보니 “눈물이 진주가 되고 고통이 진주가 된다”는 이 신부의 말이 더 절절하게 와 닿는단다.

 수녀님은 “평소에 작은 이별을 잘 준비해야 영원한 이별을 잘 한다”고 말한다. 암 덕분에 인간과 자연과 사물을 더 세밀하게 관찰하게 됐고 감사하는 마음과 행복지수가 높아졌다고 한다.

 최근 발표한 시 ‘병상일기’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수술실에서/수십센티의 장을 절제한 이후/

눈에는 안 보이고/느낌으로만 아는/불편한 결핍을 항상 안고 삽니다//짧아진 장의 길이 만큼/나의 인생도/나의 시도/전에 비해/짧아진 것이/정말 확실한데//길게 꼬인/내 욕심의 길이는/좀체 줄지를 않아 고민입니다.’

 짧아진 장의 길이만큼 욕심의 길이가 줄지 않는다는 대목이 너무 절절하다.

 “암을 미워하거나 투쟁하고 싸우기보다 동무로서 같이 가는 정겨움을 지니고 다독이면서 좋은 마음으로 대화하며 지냈어요. 그랬더니 아직은 전이를 참아 주는 것 같더라고요.”

 그는 “내일은 예측할 수 없다. 박완서처럼 내일 병원에 실려갈지 모른다”며 “오늘 하루가 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다 보니 4년이 됐다. 남한테 희망이 되도록 날마다 생각하며 산다”고 말한다. 그는 4년 동안 시집·산문집을 네 권 냈다. 시인 정호승은 “수녀님도 고통이 컸을 텐데 암을 문학적으로 더 승화되는 계기로 삼았다”며 “인생의 비밀을 풀어내며 깊어진 글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더 큰 위로와 위안의 울림으로 다가온다”고 말했다.


‘수술실에서

수십센티의 장을 절제한 이후

눈에는 안 보이고

느낌으로만 아는

불편한 결핍을 항상 안고 삽니다


짧아진 장의 길이만큼

나의 인생도

나의 시도

전에 비해

짧아진 것이

정말 확실한데


길게 꼬인

내 욕심의 길이는

좀체 줄지를 않아 고민입니다’


이해인의 시 ‘병상일기’


출처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7703726&cloc=joongang|article|related_issue
Posted by 김범석 bhumsuk


수술할 수 있게 모여 있던 암, 얼마나 예뻤는지 모릅니다
[사람 속으로] 암, 이제는 산다 … 10년 생존율 59%
간암 5년, 암에 감사한다는 연기자 강신일

배우 강신일은 간암 발병 5년째를 맞고 있다. 강신일은 간암 수술 후 충북 괴산군 칠보산 산골마을에서 6개월을 보냈다. 산의 정기 덕분일까, 암세포가 그의 통제 아래에 있다. 강신일이 오랜만에 삼청공원을 찾아 철봉을 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암에 걸려도 여자 환자의 58.9%가, 남자는 39.2%가 10년 이상 산다. 국립암센터가 1999~2007년 국가 암 등록통계에 등재된 환자 105만4683명을 분석한 결과다. 93~98년 발병 환자(남자는 29.5%, 여자는 50.5%)보다 생존율이 크게 올라갔다. 암센터가 10년 생존율을 공개한 것은 처음이다. 위·대장·유방·전립샘·갑상샘암은 높고 간·폐·췌장암은 낮은 편이다. 유방암·난소암을 겪은 김모(57·여·서울 종로구)씨는 오뚝이다. 14년 동안 암 세포가 찾아올 때마다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다. 김씨는 “암은 치료 잘 받고 잘 관리하면 살 수 있는 병”이라고 말한다.


지난달 22일 오후 서울 종로구 북악산 자락 삼청공원. 걷고, 뛰고, 산을 오르내리는 사람들 사이로 그가 걸어왔다. 배우 강신일(52)이다. 스크린 저편에서 낮게 깔리던 예의 그 깊고 단단한 목소리로 그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는 배우다. 대학로 무대에서 연기자로 잔뼈가 굵었고 불혹의 나이에 충무로와 방송국 삶을 시작했다. 이날도 새벽까지 JTBC 드라마 ‘발효가족’ 촬영을 끝내고 왔다. 하지만 그는 피곤한 내색 없이, 시종일관 차분하고 겸손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턱을 만지작거렸다. 여느 때처럼 작품 홍보를 위한 인터뷰가 아니어서 어색하다고. 극 중 배역이 아닌 강신일 자신의 삶을, 그것도 암의 흔적을 내보이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강신일은 올해로 5년째 암과 싸우고 있다. 2007년 간암 판정을 받고 간의 3분의 1을 잘라냈다. 수술 이후엔 6개월간 충북의 한 산골 마을에 들어가 살았다. 삶의 끈이나 다름없는 연기가 그리워 서울로 돌아왔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암이 전이될지도, 재발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그런데도 그는 “암에 감사한다”고 했다. 갑자기 찾아온 ‘손님’ 덕분에 삶이 완전히 달라졌다.

연극이 전부였던 20년

그는 1980년부터 연극에 미쳤다. 경희대 전자공학과에 입학했지만 공부는 뒷전이었다. 대학로에서 살다시피 했다. 극단 ‘증언’을 만들어 군인·한센인·환자 등 소외된 사람들 앞에서 무대에 올랐다. 87년 연우극단의 창작극 ‘칠수와 만수’로 대학로 연극 붐의 중심에 섰다. 옥외광고 페인트공에 대한 편견과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그린 작품이다. 여기서 그는 만수로, 문성근 현 민주통합당 최고위원은 칠수로 무대에 올랐다. 사회 문제를 소재로 한 창작연극의 뿌리 같은 작품이다. 그는 “예전엔 사상가나 철학자, 종교인이 인생의 가치를 깨닫게 해줬다면 요즘엔 배우가 그 역할을 하는 것 같다”며 “연극은 공동체와 소통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그가 연극에 몸을 던진 이유다.

무대에서 땀 흘린 뒤 극단 사람들과 삼청공원에 몰려와 술과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아프게 타오르던 시절이었다. “연극에 열정을 다 쏟고 살다가 죽어도 행복할 것 같았어요. 너무나 이기적인 생각이었죠. 가족들에게 정말 못할 짓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지만요.”

건강 관리는 우스운 얘기였다. 먹는 걸 밝히는 게 사치라고 생각했으니까. 경제 관념도 없었다. 돈이란 적당히 먹고, 입고, 이동하는 데 필요한 정도만 있으면 됐다. 그렇게 99년까지 연극판에서 20년을 살았다. 쉰을 넘긴 이제야 강신일은 말한다. “생활 불규칙하지, 제때 영양도 공급해 주지 않지… 수십 년 학대받은 몸에 탈이 안 날 리 없지요.”

“내가 암, 암이라니”

강신일의 도시락. 잡곡밥, 삶은 양배추와 브로콜리, 감태전, 가지·고사리 등 나물이다. 그의 아내가 인공조미료와 소금을 쓰지 않고 만들었다. 보온병의 물은 동료 배우 정원중씨가 칠보산에서 따 준 겨우살이 나뭇가지를 끓인 것이다.
 결혼 후 B형간염에 걸린 사실을 알았다. 아내와 “매년 건강검진을 잘 받겠다”는 약속을 했다. 한때 건강검진에서 간 수치가 빠르게 올랐다. 이상 신호가 왔지만 ‘좀 쉬면 나아지겠지’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넘기고 또 넘기고…. 그래도 건강검진을 거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의사가 처음에는 2년에 한 번 보자고 하더니 점점 짧아졌다. 나중에는 6개월마다 검진 날짜가 돌아왔다.

 그런 그에게 강력한 경고가 왔다. 2007년 8월, 한창 영화와 TV드라마에서 잘나갈 때였다. 셋째 딸 출산을 앞두고서야 영화에 눈을 돌린 그였다. 강우석 감독의 영화 ‘공공의 적’에서 설경구와 티격태격하는 강력반 엄반장 역으로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이후, 영화와 TV드라마 촬영이 눈코 뜰 새 없이 이어졌다. 집에서 갑자기 구토를 했다. 살이 쭉쭉 빠졌다. ‘술을 좀 줄이면 괜찮아지겠지’. 이번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여전히 연기가 생활의 중심이었다. 양을 따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술을 좋아했다. 담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한 시간마다 깨는 불면(不眠)의 밤이 계속됐다. 그렇게 두어 달을 흘린 뒤에야 병원을 찾았다. 뜻밖의 소식. 의사는 “간에 종양이 보인다”고 했다. 머리가 멍해졌다. ‘암, 암이라고? 우리 딸들은 어쩌나. 하고 싶은 연기도 아직 많은데 어쩌라고…’.

 할 말을 잃은 그에게 아내가 말했다. “마지막으로 담배나 한 대 피워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아내는 참 의연했다. 두 달 후 2007년 12월 서울아산병원에 입원했다.

오! 나의 예쁜 암세포

갖가지 검사를 받은 후 “수술이 가능한 상태”라는 의사의 말에 안도했다. 길이 3cm짜리 암 덩어리 때문에 간의 3분의 1을 잘라냈다. 그는 “수술할 수 있게 한 군데 모여 있던 암세포들이 얼마나 예뻤는지 모른다”고 말한다. 처음엔 두렵다가도 ‘겨우 3cm잖아’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다. 의사는 몇 기(期)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묻지도 않았다. 지금도 모른다.

 수술할 무렵에 드라마 ‘황금신부’를 찍고 있었고 영화 ‘강철중’ 촬영을 앞둔 때였다. 강우석 감독에게 “간암 수술 날을 받았다. 에너지를 다 쏟을 자신이 없다.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말했다. 본인 때문에 영화를 미룰 수도, 망칠 수도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강 감독은 “다른 사람에게 이 배역을 맡길 수 없다”며 “몸이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다. 그를 믿고 기다려주고 찾아준 사람들의 신뢰 위에서 그는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후 2주 만에 그는 촬영장으로 향했다. 시청자와의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아물지 않은 수술 부위를 복대로 동여맨 채 이를 악물었다. 영화 ‘강철중’ 촬영을 마치자 2008년 4월이었다. 촬영 후 마음이 홀가분해졌지만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그는 돌연 “산으로 가겠다”고 선언했다. “TV도, 컴퓨터도 없는 곳에서 면역력을 키우고 싶다”고.

칠보산의 6개월

산을 생각한 이유는 서울에서 도저히 건강을 지킬 자신이 없어서다. 극심한 불면증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는 밤에 아파트 위층에서 물 내려가는 소리,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여름날 밤 취객들 고함소리에 밤새 몸을 뒤척였다.

 그래서 찾은 곳이 충북 괴산군 칠성면의 칠보산이다. 친구이자 배우인 정원중(52)이 칠보산 자락의 마을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가 자기 집 별채에서 살자고 권했다. 연기에만 미쳐 살아온 28년의 삶에 그제야 쉼표가 생겼다. 텃밭에서 직접 기른 상추·고추에다 미나리·민들레 나물·가지를 넣고 끓인 된장찌개에 현미밥을 먹었다.

 28년 만의 대본 없는 생활은 심심했다. 주 1회 서울 나들이 때 카세트·CD·기타를 챙겼다. 노래를 부르면 암 치료에도 도움이 되겠다 싶었다. 그리고 가수 고(故) 김광석이 떠올랐다. 극단 학전 시절부터 아끼던 후배였다.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대 마음에 다다르는 길

찾을 수 있을까 언제나 멀리 있는 그대

기다려 줘, 기다려 줘

내가 그대를 이해할 수 있을 때까지’

(김광석의 ‘기다려 줘’ 중에서)


기타를 치며 부른 그 노래는 예전의 그 노래가 아니었다. “남녀 간 사랑 얘기가 아니었어요. 내가 지금 암 때문에 산속을 헤매고 있지만 그동안 내가 이해하지 못했던 가족, 친구, 동료들… 내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하고 싶은 내 마음이었죠.”

 어느 날은 보고 싶은 후배에게 무작정 전화해 노래를 불렀다. 차분하다 못해 침울하던 성격이 차츰 밝아졌다. 연기에 대한 스트레스, 암에 대한 두려움…. 불안이 조금씩 사그라졌다.

매일 도시락을 들고 산을 찾았다. 4~5시간 해발 800m 산을 오르내렸다. 거친 숨을 내쉴 때마다 몸이 나아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격한 운동으로 체력을 키워야 암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강신일은 이날 인터뷰에서 “그때 등산을 후회한다”고 말한다. 그는 “얼른 건강을 되찾아야 한다는 조바심에 어리석은 행동을 한 것”이라며 “간에 무리가 가는 운동을 해서는 안 됐다”고 말한다. 요즘은 스트레칭을 하거나 가벼운 산책을 한다.

돌아온 서울, 암이 앗아간 사람들

 6개월 만에 서울로 돌아왔다. 가족이 그리웠다. 몸이 맑아지면서 다시 세상에 나가야겠다는 의지도 살아났다.

 변화는 몸을 아끼면서 시작됐다. 현미잡곡밥, 유기농 채소로 만든 무염식(無鹽食) 반찬으로 하루 세끼를 챙겼다. 암 선고 직후 빠져든 일본의 대체요법과 식이요법 치료에 관한 책들의 영향이 컸다. 동료 배우들이 식당으로 향할 때 그는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다. 며칠씩 지방 촬영을 갈 때는 보온밥통에 밥을 따로 가져간다. 경기도 고양시의 한 주말농장에서 직접 재배한 배추와 무로 김장을 하고, 봄에는 시금치·부추·깻잎 농사를 짓기도 한다. 강신일은 “내가 먹을 것을 직접 기르는 재미가 보통이 아니다”라며 웃는다. 먹는 것을 사치라 여기던 그의 달라진 모습에 사람들도 놀란다.

 그가 살기 위해 기를 쓰는 동안 암은 주변을 맴돌았다.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이던 후배 박광정이 폐암 선고를 받았다. 1년간 짧은 투병을 마치고 박씨는 떠났다. 강신일은 “나 혼자 살았다는 생각에 숨이 막혔다”고 했다. 그리고 또 2년이 지난 2010년, 친형마저 암 진단을 받았다. 그와 같은 간암이었고, 말기였다. 뼛속까지 번진 암세포는 형을 앗아갔다. 연기에 빠진 동생 대신 집안의 대소사를 혼자 책임지던 형이다. 그는 “나 때문에 형이 돌아가신 것 같다”며 목이 멨다.

강신일은 이제야 ‘삶의 리듬’에 눈을 떴다. ▶건강한 식단 ▶질 높은 수면 ▶사람과 일(연기)에 대한 애정이다. 그는 거짓 없는 열정을 매일 되새긴다. 매주 동서울대학에서 연기 강의를 한다. 암 투병 중에도 중단하지 않았다. 연기인생 2막을 준비하는 스펙 쌓기가 아니다. ‘반성의 시간’에 가깝다. “젊은 친구들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죠. 연기에 대한 허세는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일이니까요.”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요즘은 내리 3~4시간씩 잔다.

“암은 신의 손길”

평생 배우로 살아온 그는 지난해 처음으로 연극기획자로 나서 ‘강신일과 여우’라는 작품을 기획했다. 그 수익금은 저소득층 어린이들에게 기부했다. 모두 암이 가져온 변화다.

 “나는 대단한 스타도, 많이 알려진 배우도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뭔가 기여하고 기부하기엔 힘이 부치지만, 이 기획 연극이 이익을 내서 어려운 사람을 돕는 데 쓸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KT의 쿡TV 명품 연극이라는 메뉴에서 강신일의 연극을 선택하면 결제금이 저소득층 어린이 문화 지원에 쓰인다. KT에서 받은 100만원도 그가 8년째 홍보대사로 있는 자살예방단체 ‘생명의 전화’에 기부했다.

 강신일은 말한다. “이제는 암에 감사해요. 암은 스스로를 혹사하며 교만했던 나에 대한 신의 손길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는 간암 이후, 자신의 연기도 달라졌다고 믿는다. 함께 울어준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 연극만 하다가 죽어도 좋다 여겼던 오만함이 부끄럽다.

 “암을 계기로 상대에 대한 배려, 이해, 관심의 힘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더 깊이 소통하고 나누고 싶습니다.” 암 수술 후 만 5년이 되는 올가을, 그의 두 번째 연극이 무대에 오를 예정이다.


간암과 싸우는 배우 강신일, 삶의 원칙

금연(禁煙)과 금주(禁酒), 술 마시지 않고도 재밌게 즐길 방법은 많다

하루 세 끼 식사를 거르지 않는다

가능한 한 외식을 안 한다

직접 기른 채소와 유기농 식재료로 조미료 없이 요리한다

스트레칭·산책·족욕·반신욕으로 가볍게 몸을 푼다

얼른 나아야 한다는 조바심은 금물, 욕심은 스트레스가 된다

규칙적이고 질 높은 수면으로 정신을 맑게 유지한다

가족·친구·동료들에게 사랑하고 감사한 마음을 자주 표현한다

내 일(연기)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고, 새로운 일에 도전한다

더불어 사는 삶, 나누는 삶을 실천한다


출처 중앙일보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ctg=1200&Total_ID=7703724&cloc=joongang|article|related_issue 



Posted by 김범석 bhumsuk

[사람 속으로] 암, 이제는 산다 … 10년 생존율 59%

17년간 골육종 유방암 직장암, 그래도 그녀는 웃는다

하나의 암도 어려운데 한 사람에게 세 개의 암이 찾아왔다면 어떨까. 그런 경우를 찾기도 쉽지 않다. 연세암센터 환자 중 10년 이상 생존자 4600여 명 가운데 2개 이상의 암을 앓은 환자는 5.2%다.

세 개 이상 암 환자를 찾기는 하늘의 별 따기에 가까웠다. 인터뷰를 거절하거나 상태가 너무 안 좋아 인터뷰를 요청하기에 민망한 환자도 있었다. 서울아산·삼성서울·서울대·신촌세브란스병원과 국립암센터 등 내로라하는 암 병원들의 도움을 받아 한 달여 만에 5명의 환자를 찾았다. 그들의 공통점,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두 낙천적 성격의 소유자였다.


서른둘 인생 절반 암투병, 그늘 없는 장조은씨

4개 암을 이겨내고 있는 장조은씨가 지난달 23일 친구와 함께 부산 해동용궁사를 둘러보고 있다. 이날 장씨는 “빨리 나아서 바다를 또 보러 오겠다”고 다짐했다. [부산=오종택 기자]

장조은(32·여·경남 밀양시)씨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연세암센터)에서 치료를 받는 환자다. 지난달 16일 병원에서 소개받고 전화를 걸었다. 젊은 여성이라는데 성격이 어떨지 걱정이 앞섰다. 질문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몸 상태가 어떠냐, 힘들지 않으냐 등의 질문을 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암 투병 얘기를 꺼내놨다. 특유의 까르르 웃음을 연발하면서. 그녀는 오히려 “기자님 힘내셔요”라며 일상에 지친 기자를 위로했다.

 마침 친구와 부산 여행을 간다고 했다. “같이 가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흔쾌히 OK.

 조은씨는 지난달 23일 부산시 기장군 해동용궁사를 찾았다. 부산은 이미 봄기운이 느껴졌다. 김민옥(32·여)씨는 중학교 단짝 친구라고 했다. 둘은 팔짱을 낀 채 절을 둘러보고, 불상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동자승 조각상을 보고 “까르르” 웃음을 쏟아냈다. 항암 치료 때문에 듬성듬성해진 머리를 감추려 푹 눌러쓴 보라색 모자도 여행객 무리 속에 묻혔다.

 조은씨는 암에 익숙해진 지 오래다. 인생의 절반을 암과 함께 살았다. 열다섯에 골육종(뼈암)에 걸렸다. 한창 예뻐야 할 20대에는 유방암에 걸렸다. 2001년에 오른쪽, 2007년 왼쪽, 그리고 재발…. 여자로서의 삶이 시작도 하지 못하고 끝인가 싶었다.

 20대에는 남들처럼 남자친구와 밀고 당기기를 하거나 일자리 경쟁을 해 볼 기회가 없었다. 중·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마쳤고 대학은 남들보다 5년이 늦은 2003년에야 들어갔다. 대학에서도 암 투병은 계속됐지만 휴학은 하지 않았다. “대학생활이 너무 재미있어서”라고 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쾌활한 대학생이었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면서 특수교육까지 부전공을 했다.

 2007년 대학을 졸업했다. 정규직 일자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암 치료를 받으러 자주 서울을 오가야 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특수교육 전공을 살려 장애아동들을 집에서 돌봐주는 가정교사 일을 시작했다. 생활이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가 싶었다. 그런데 지난해 9월 다시 암이 찾아왔다. 이번에는 더 지독했다. 직장암 말기였다. 병원에서 7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조은씨는 좌절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암에 여러 번 걸리다 보니 이번에도 잘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어요.”

 수술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항암치료로 종양을 줄인 덕분에 대장과 간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았다. 요즘은 2주에 한 번씩 올라와 항암치료를 받는다. 주치의인 연세암센터 정현철 원장은 “과거와 달리 요즘은 새로운 치료법이 많이 개발돼 말기라 해도 포기하면 안 된다”며 “조은씨는 마침 표적치료제가 개발돼 항암제와 같이 썼더니 암이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그녀에게는 그늘이 없다. 자주 소리 내서 웃는다.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다. 극진하게 보살펴 주는 가족의 힘이 크다고 했다. 조은씨는 1남3녀 중 둘째 딸이다. 조은씨는 “부모님, 형제들, 친가, 외가 식구들 모두 나를 위해 좋다는 거 다 찾아서 먹이고 자주 모여서 놀기도 한다”며 “가족의 극진한 배려 덕에 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은씨는 여행을 다니면서 마음을 다잡는다. 지난해 말 수술을 받기 전 혼자 제주도 올레길을 일주일 걸었다. 아름다운 자연 풍광을 보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조은씨는 “예전에는 투병 중에 집에 거의 누워 있다시피 했는데 요즘은 여행을 자주 다닌다”며 “바람을 쐬고 활력소가 돼서 좋다”고 했다. 조은씨는 “순간순간이 소중하고 조그만 것에도 감사하게 됐다”고 했다.

 정 원장은 “암을 이기는 사람들은 암을 진단받으면 자신의 인생을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고 새로운 계획을 세운다”며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마인드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위 대부분 잘라내고 식도암까지, 예순한 살 한종례씨

죽을 운명인데 살아나 … 의사 말 120% 따른 덕이죠


지난달 15일 서울 강동구의 한 아파트. 한종례(61·여)씨가 7개월 된 외손녀 은서의 양쪽 겨드랑이를 붙들고 아래위로 흔들며 어르고 있다. 울먹이던 아기 표정에 금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옆에는 네 살배기 큰손녀 예은이가 장난감을 갖고 놀고 있다. 예은이는 할머니가 내 준 과일과 떡을 먹으면서 쉴 새 없이 돌아다니거나 말을 걸었다.

 한씨의 마른 손목이 눈에 들어왔다. 한씨는 2008년 12월 전북 전주의 한 병원에서 위암 4기 진단을 받았다. 병원에서는 “위험한 상태니 마음의 각오를 하라”고 했다. 유서를 쓸까 했다. 딸이 출산을 앞두고 있어 알리지 않고 수술을 미뤘다.

<여기를 누르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이듬해 1월 딸이 출산한 후 국립암센터로 병원을 옮겨 수술을 받았다. 위를 다 잘라냈다. 생각지도 않은 식도암이 튀어나와 식도를 일부 잘랐다. 수술실에 들어갈 때 가족에게 잘 못 해준 게 가슴에 사무쳤다. 한씨는 “내가 이렇게 생을 마감한다는 아쉬움보다 내가 가족에게 못 해준 게 더 사무치게 후회되더라”고 당시를 회고한다. 남편이 그리 좋아하는 호박전 하나 부쳐주지 못해서, 자식들에게 더 잘 해주지 못 해서 가슴이 저몄다.

 수술 후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김영우 위암연구과장이 “축하드립니다. 암이 2기였어요”라고 인사를 건넸다.

 한씨는 “생을 포기하고 있었는데, ‘이제 살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한다. 한씨는 “내가 한 번 죽을 운명이었는데 살아났다. 하루하루 충실하게 살아라”라고 자식들에게 얘기한단다.

 수술 전날에는 갑상샘암이 발견됐다. 한꺼번에 할 수 없어 6개월 뒤 2009년 7월 수술을 받았다. 방사선 치료와 항암치료가 이어졌다. 한씨는 이제 6개월마다 정기검진만 받으면 될 정도로 호전됐다. 한씨는 가족의 극진한 간호와 종교(원불교), 의사의 말을 120% 따른 덕분에 지금의 상태까지 왔다고 믿는다.


3개 암 이겨내는 환자들

논밭 하루 30분 걸어요 … 운동 삼아 일합니다


1995~2011년 연세암센터를 찾은 13만454명의 암 환자 중 5696명(4.4%)이 2개 이상 부위에 암이 걸렸다. 3개 이상은 251명, 4개 이상은 15명이었다. 여러 개 암이 생기는 이유는 암 유발 억제 유전자에 손상이 가거나 불균형적인 생활습관 또는 주변 환경의 변화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5696명 중 ‘유방+갑상샘’이 410명으로 가장 많다. ‘대장+위’ 338명, ‘폐+위’ 189명, ‘전립샘+방광’ 151명이다. 연세암센터 정현철 원장은 “한 가지 암이 생기면 이미 우리 몸에 유전자 변화가 왔다는 경고이므로 정기적으로 검진받고 올바른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한다.

 여러 개 암을 잘 통제하는 환자들의 대부분은 성격이 느긋하고 긍정적이다. 종교를 가진 경우가 많다. 정상적으로 일상생활을 하면서 삶의 의지를 확인하고 운동을 한다. 채식과 단백질 위주의 식습관을 갖고 있다. 김지영(80·충남 아산시) 할아버지는 “논이랑 밭으로 매일 다니다 보면 하루에 30분을 꾸준히 걷게 된다. 운동 삼아 일한다”고 말한다. 전직 대기업 임원 박모(59·경기도 부천시)씨는 정기검진 덕에 암을 조기에 발견한 점을 1등 공신으로 꼽는다. 허봉만(60·인천시 남동구)씨는 “아침마다 오늘 하루 눈떠서 다행이라는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에게도 더 잘 하게 된다”고 말했다



출처: 중앙일보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705/7703705.html?ctg=1200

Posted by 김범석 bhumsuk


<앵커>

중국산 장뇌삼을 또 국산으로 속여 판 일당이 검거됐습니다. 독약과 다름없는 농약에 범벅된 장뇌삼이었는데, 말기 암 환자에게도 속여 팔았습니다.

조재근 기자입니다.


<기자>

일간지에 실린 장뇌삼 광고입니다.

강원도 평창에서 키웠다고 돼 있지만 실제로는 중국산 장뇌삼이었습니다.

54살 서 모 씨 등 5명은 보따리상을 통해 들여온 중국산 장뇌삼을 국내산으로 속여 팔다 해경에 적발됐습니다.

해양경찰이 압수한 이 장뇌삼에서는 두 종류의 맹독성 농약성분이 검출됐습니다.

둘 모두 국내에서는 생산과 사용이 금지된 것입니다.

살균제인 퀸토젠은 기준치의 13배, 살충제인 BHC는 기준치의 38배가 검출됐습니다.

[송재석교수/관동대 예방의학과 : BHC는 발암성과 면역계 이상, 생식계 이상 등을 일으키고 더욱이 잔류성이 높기 때문에 1970년대 후반부터는 사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뿌리에 3000~4000원 짜리를 몇만 원씩 받고 속여 팔았습니다.

확인된 피해자만 520여 명으로 3000뿌리 넘게 팔렸습니다.

심지어 말기 암 환자까지 속였습니다.

[장뇌삼 원산지 둔갑 유통 피의자 : 겨울이고, 장뇌삼을 국내에서 캐지 못해서 그렇게 됐습니다. 미안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최문기/동해지방해양경찰청 외사계장 : 2012년 1월 26일부터 품질검사 합격증을 장뇌삼 상자에 붙이도록 규정하고 있습니다. 일반 소비자들은 그 합격증이 붙어 있는 것을….]

해경은 중국산 장뇌삼의 밀반입책과 유통조직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확대할 계획입니다.

최종편집 : 2012-03-22 08:02

출처: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126825

Posted by 김범석 bhumsuk


생존자 60%도 피로 호소
정도 심할 땐 진료받아야
무알코올·무카페인 음료와
고기·콩 등 단백질 섭취를

[암 환자 건강 이렇게 지키자]

피로 관리

암 환자는 물론 암 생존자들의 일상을 방해하는 대표적인 증상은 바로 피로다. 암 환자의 90%가 피로를 호소하고 있고, 이들 가운데에는 아무리 잠을 자거나 쉬어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 경우도 많다. 피로 때문에 불안과 초조감이 들기도 하며, 규칙적인 운동도 못할 수 있다. 따라서 피로가 점점 심해지거나 일상생활마저 할 수 없을 정도라면 의사의 진찰을 받는 것이 좋다.

암 환자 90%가 심한 피로감에 시달려
피로는 누구나 겪을 수 있지만, 특히 암 환자 및 생존자는 심한 피로감으로 불안감을 느끼거나 초조해지기도 하며, 일상생활의 장애를 겪기도 한다. 암 환자의 피로 증상은 온몸이 지치는 느낌이 들고,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에너지가 부족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또 신체적 활동에 대한 의욕이 없어진다. 문제는 이런 암 관련 피로는 일반적인 피로와는 달리 휴식이나 잠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아울러 암 환자의 건강을 위한 규칙적인 운동을 방해하는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런 암 관련 피로는 치료 중 또는 치료 뒤에 나타날 수 있다. 특히 방사선 치료나 항암제 치료 또는 면역치료 등 암 치료를 받는 환자들의 90%, 치료가 끝난 암 생존자의 60%가 이런 피로를 겪는다는 조사 결과도 있다. 실제 국내에서 유방암 생존자 193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치료가 끝난 이후에도 3명 가운데 2명이 의사의 검사와 치료가 필요한 정도의 피로가 지속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암 관련 피로는 암 환자의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까지 곤란하게 만든다. 암 생존자의 직장 생활이나 대인관계를 막는 주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결국 직장을 그만두게 돼 암 생존자의 경제적인 어려움마저 가져올 수 있다. 피로 때문에 암 환자들이 입는 경제적 손실이 해마다 최소 2000억원에 이른다는 추정도 나온 바 있다.

어떤 활동도 못할 것 같은 피로 느끼면 진료받아야
암 환자의 피로는 자신이 평가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지난 1주일 동안 경험했던 피로를 0점에서 10점 사이로 표시해 보는 방법을 쓴다. 스스로 평가하기에 피로를 전혀 느끼지 못하면 0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한 피로를 10점으로 했을 때 자신의 피로가 4점 이상이라면 의사의 진료를 받아 원인을 찾는 것이 권고된다. 특히 피로가 해소되지 않은 채 점점 더 심해지는 경우, 심한 피로로 일상생활을 할 수 없거나 하루 종일 누워지내는 경우, 일상활동 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피곤해 어떤 활동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경우라면 반드시 진료를 받는 것이 좋다. 또 휴식과 수면으로도 피로가 해소되지 않는 경우, 피로 때문에 사회생활이나 일상생활이 방해를 받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암 환자의 피로는 암 그 자체나 치료 과정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빈혈, 갑상샘질환, 당뇨, 감염, 간질환 등 때문에 생길 수 있고, 이는 충분히 치료가 가능하다는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우선순위 정해 피로하기 전 중요한 일 해야
암 환자 및 생존자의 피로를 조금이라도 줄이는 방법은 먼저 매일 2~3리터 정도의 무알코올 및 무카페인 음료를 마시는 것이다. 물론 수분 섭취와 관련된 의사의 특별한 지시가 없는 경우다. 식사와 관련해서는 의사가 별다른 주의를 주지 않았다면, 고기, 우유, 달걀, 콩 등 단백질이 풍부한 음식을 포함해 균형 잡힌 식사를 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산책 등을 하면서 자연 속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가까운 이들과 대화를 하는 등과 같은 적당한 휴식 및 적절한 활동도 권고된다. 하지만 암 환자 및 생존자가 피로를 피할 수 없다면 일상에서는 일의 우선순위를 정해 하루 중 에너지가 가장 많을 때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먼저 하는 것이 좋다. <끝>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암예방관리 전공)

출처 http://www.hani.co.kr/arti/society/health/524176.html

(편집자주: 한가지만 덧붙이자면..  일부 소세포폐암 등에서 SIADH라고 해서 몸안의 염분수치가 떨어져 있는 경우에는 수분을 많이 섭취하면 안되고 이런 경우에는 오히려 수분 섭취를 0.5liter 이하로 제한해야 합니다)

Posted by 김범석 bhumsuk

서울대 명의 "말기암환자 치료중단 권하면…"

[중앙일보]입력 2012.03.03 01:32 / 수정 2012.03.03 08:31

[j Special] 허대석 서울대병원 종양내과센터장 … “임종의 질 논의해야 합니다”
생의 마지막 고귀한 시간, 환자가 결정하고 누려야죠

‘암(癌)은 앎이다’라는 말이 있다. 건강할 때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것을 아픈 몸을 통해 새롭게 배운다는 의미다. 일과 삶의 의미, 시간의 가치, 가족과 친구들의 소중함까지…. 그러나 안타까운 면도 있다. 끝내 완치되지 않는 경우다. 서울대병원 종양내과센터장 허대석(56) 교수는 그 암과 앎의 현장에서 30년을 보내온 의사다. 독특한 것은 임상·연구·행정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른 그의 이력이다. 첨단 치료법 연구에 매달려온 그는 악성 림프종 치료 분야에서 ‘명의’로 손꼽히지만, 지난 3년간 한국보건의료연구원(NECA) 원장을 맡아 의료 연구와 행정을 지휘했다. 또 ‘무의미한 연명치료의 중단’과 호스피스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알리는 데도 앞장서 왔다.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12층 연구실에서 허 교수를 만났다. 그는 “의료는 질환만을 다루는 단순과학이 아니다. 사회·문화의 흐름 안에서 답을 찾아야 하는 융합학문”이라고 강조했다.

글=이은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암 치료기술 많이 발전했지만 …

●요즘 많은 사람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질환이 암인데요. 30년 전에 종양내과(악성 종양, 즉 암의 진단과 치료를 다루는 진료과)를 선택하셨죠.

 “그때 종양내과를 선택한다고 하니까 동료들이 농담으로 ‘장의사’가 되려고 하느냐고 했어요. 당시만 해도 사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직업상 사람의 죽음을 많이 보는 현장에 있는 셈이죠.”

●그런데 왜 종양내과를 선택하신 거죠.

 “진행된 암이라는 것, 굉장히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그런 만큼 도전할 기회가 많은 분야라고 생각했어요. 내가 가서 할 일이 많겠구나, 치료법을 개발해야겠구나 생각했죠.”

 실제로 허 교수는 새로운 치료법에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 피츠버그대 암연구소와 미시간대에서 4년간 면역치료, 유전자 치료 등을 연구했다. 특히 악성 림프종(임파선암) 치료성과를 높인 그는 국내 림프종 연구와 치료에서 최고 평가를 받는 의사로 꼽힌다.

●지난 20~30년간 암치료가 획기적으로 발달했죠.

 “물론이죠. 진단도 빨라지고 정확해졌죠. 다양한 항암제가 개발되니까 치료 성과가 좋아지고 암환자의 생존율이 높아졌고요. 하지만 모두가 완치되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다 보니 환자를 낫게 하지 못하면 의료의 실패라고 여기는 생각이 너무 지배적이에요. 끝도 없이 완치를 위한 실험실 연구에만 매달리기에는 현장에는 너무 많은 고통이 있어요.”

 그가 환자를 만나며 무엇보다 안타까워한 것은 ‘3분 진료’였다. 과거에 하루에 암환자를 100명씩 봐야 하는 상황에서 쫓기듯 일했다. ‘냉정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고 했다.

●어떤 점이 가장 힘들었나요.

 “사실 3분 사이에 처방을 내고 그런 거는 괜찮아요. 문제는 항암제를 처방하다가 어느 시점에 가면 항암제가 치료에 도움을 주기보다는 더 이상 효과는 없고 부작용만 생기는 시기가 있다는 겁니다. 기술적으로 이런 때를 ‘말기’라고 하는데, 이때부터는 평균 생존기간이 약 11주 정도가 돼요. 사실 그때는 항암제를 중단하는 게 환자를 위하는 일인데, 이런 상황을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게 ‘3분’ 이내에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죠.”

 허 교수는 이것을 가리켜 “잔인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그만 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말이냐’ ‘이제 집에 가서 (죽음을) 기다리라는 뜻이냐’며 격하게 반응하기 일쑤였다. 환자 가족들은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오리라 짐작을 하기도 하지만 막상 소식을 접하면 쉽게 수용하지 못했다. 눈물을 흘리거나 실신하거나 불같이 화를 냈다. “최대한 객관적이 되려고 했지만 쉽지도 않고, 환자와 보호자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하는 게 항상 아쉽고 미안했습니다.”

 그는 1991년 병원 안에 ‘등불’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의사와 간호사, 약사, 사회복지사 등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병원 내의 별도 상담 모임이다. 그러나 이런 활동이 ‘봉사’에 머물게 아니라 ‘제도’로 정착돼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호스피스 활동을 지원하는 의료 제도를 정부에 요청했지만 아직까지 해결이 안 되고 있어요. 대만, 일본도 2000년대 들어 호스피스를 제도화했는데 한국은 아직 바꾸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정확히 무엇이 문제죠.

 “현재 의료제도가 환자를 완치시키는 데만 집중돼 있어 그 ‘완치’ 대상이 아닌 환자들은 사실상 방치되고 있는 겁니다. 임종 한 달 전 시점에서 항암제를 쓰는 비율이 미국이 10%인 데 반해 한국은 30%에 달합니다. 과잉 진료가 이뤄지고 있는 셈이죠. ”


시간의 질(質)을 생각해야

 첨단 치료법 못잖게 지난 20년간 그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 ‘임종의 질(質)’에 대한 부분이다. 말기 암환자의 임종과정에서 심폐소생술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는 고통이라는 게 그의 입장이다.

●사실 가족들은 연명치료를 하는 게 ‘도리’라고 느끼는 경향이 있습니다.

 “임종이 임박한 환자에게 기술을 적용하면 생명은 연장할 수 있죠. 이것을 어디까지 해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이렇게 병원에서 뭔가 끝없이 하다가 눈을 감게 하는 게 정말 환자를 위한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라고 생각해요. ‘항암제를 계속 쓰면 오히려 환자에게 좋지 않을 것 같다. 안 쓰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리면 모두 공통적으로 말하는 게 ‘끝까지 최선을 다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최선이 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죠.”

●어떻게 다른가요.

 “그 최선이라는 게 치료하다가 나빠지면 중환자실 가서 인공호흡기 달고, 다시 항암치료하고, 다시 중환자실 가고…. 끝까지 뭔가를 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고통받는 시간만을 연장시키는 측면이 있거든요. 시간의 의미를 지나치게 기계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데도 사람들이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사회문화적인 요인이 크죠. 병원에서 말기 암환자 가족(20 가족)을 상대로 조사한 적이 있는데, 환자와 가족이 (환자가 세상을 떠날 경우를 대비해) 솔직하게 대화하고 있는 경우는 일곱 가족에 불과했어요. 대부분은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거의 못하고 있고요. 어떻게 보면 당사자의 일에 환자 본인이 고립된 측면도 있어요. 환자가 자신의 입장에서 문제를 정리해야 하는데 그걸 못하고 있는 거죠. 의료진은 제도가 방어를 안 해주니까 방어적인 진료를 하고 있고요.”

 허 교수는 한국에서 한 해에 약 18만 명이 만성질환을 앓다가 사망하는데, 이 환자 중에서 임종 직전에 심폐소생술이나 인공호흡기 달고 사망하는 환자가 3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그는 “매년 3만 명 이상의 환자가 인생 마지막의 귀한 시간을 제대로 가져보지 못하고 간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이것을 정면으로 논의하고, 제도 도입을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된다”고 덧붙였다.

●임종을 어떻게 맞느냐가 ‘제도’와 어떻게 관계 있는지 언뜻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제일 큰 부분이 건강보험입니다. 예를 들면 마지막까지 항암제·인공호흡기를 쓰는 것은 보험이 적용돼요. 그런데 환자가 집으로 돌아가 진통제를 투약받으며 심리적으로 안정할 수 있게 도와주는 호스피스에는 보험적용이 안 돼죠. 그게 가장 문제입니다. 몇 년째 시범사업만 하고 제도화하지 못하고 있어요. 제도를 결정해야 하는 기관조차도 ‘무의미한 연명치료’ 중단을 단순히 ‘포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심리적으로 ‘포기’는 받아들이기 어렵죠.

 “그렇죠. 연명치료 중단을 ‘패배자’(루저)가 되는 걸로 여기는 경향이 심해요. 사실 그걸 받아들이고 남은 시간을 자기 시간으로 보내는 게 진정한 승자(위너)인데도 병과 끝까지 투쟁해야 한다고 생각하죠. 한국 사람들에게 그런 투쟁정신이 있으니까 경제발전을 여기까지 이룩한 것은 맞는데, 부정적 측면도 있죠. 보통 죽음의 5단계를 부인,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 보호자들은 환자가 이 같은 과정을 다 거칠 기회조차 주지 않아요. 부질없는 희망 속에 고통만 겪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환자가 많다는 것입니다.”

 허 교수는 “의사로서 당연히 생명을 지켜주고 싶지만 그것이 불가능할 때는 남아 있는 삶의 소중함을 지켜주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통증 너머 고통까지 끌어안는 의료 돼야

●현장에서 일하시며 ‘의료’에 대한 생각이 바뀌었을 것 같은데요.

 “처음에는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해 도움을 주자, 이런 생각만 앞섰죠. 시간이 지나니 의료가 지나치게 ‘기술’ 중심으로만 흘러왔다는 점이 문제로 보여요. 예컨대 의사는 환자를 보는 게 아니라 질환을 보고 있고, 제도도 이런 쪽으로만 자리 잡았고요. 기술은 앞으로도 계속 발전해야 하죠. 의료를 보다 전인적인 시각에서 보는 게 필요해요.”

 허 교수는 통증(pain)과 고통(suffering)은 같은 용어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까지 의료가 환자의 통증을 치료하는 데 초점을 맞춰왔다면, 앞으로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고 보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허 교수가 그리는 바람직한 의료의 모습이다.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유전자 치료, 임종환자 연구(호스피스), 정책 등 지난 30년간 제가 해온 일은 다양했어요. 하나하나 전공하는 데 평생을 바쳐도 될까 말까 한 일들이죠. 어떻게 보면 수박 겉핥기 식으로 보이겠죠. 하지만 이런 경험 덕분에 의료를 한 부분만 보지 않고, 전체를 융합적으로 보게 됐습니다. 이 경험을 갖고 의료가 보다 더 사회와 교류하면서 자리를 잡아가는 데 기여한다면 보람이 있을 거라 믿고 있어요.”


종양내과 의사로 일하며 배운 것

의료의 본질은 환자를 진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허대석 교수가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는 격언이 있다. “to cure sometimes, relieve often, comfort always”라는 말이다. 풀이하면, "의사가 완치할 수 있는 환자는 많지 않다. 가끔 환자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있다. 하지만, 환자의 고통을 줄여주는 일은 의사가 노력하면 항상 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는 “ 나이가 들수록 의사가 환자의 아픔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고 있다”고 했다.

환자를 치료하고 돌보는 것은 ‘협업’

흔히 의사의 역할을 ‘질병을 고쳐주는 사람 ’이라고 여기는데, 허 교수는 “그게 전부는 아니다”고 말한다. 환자 자신이 자신의 병을 치유하는 것이고 의사는 그 과정이 효율적으로 이뤄지도록 옆에서 도와주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라는 것. 특히 암환자의 의료는 ‘팀 어프로치(team approach)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환자와 의사뿐만 아니라 사회복지사, 간호사, 봉사자가 다 함께 협력해야 한다는 의미다.


허 교수가 말하는 ‘마지막 시간’ 의미

남은 한 달, 강아지 키워 보고 싶다던 열 살 소년 …


허대석 교수는 인터뷰 도중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을 거듭 강조했다. 임종이 얼마 남지 않은 환자에 대한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등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수없이 생각했던 화두라고 했다. 그러면서 시간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됐다는 사례를 들려줬다.

 소아 암병동에 있었던 열 살짜리 소년은 백혈병 환자였다. 항암제 치료를 받고, 골수이식을 받는 등 많은 치료를 받았으나 어느 날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다. 말기였다. 병원에서 ‘남은 시간이 한 달쯤’이라고 말해줬다. 이 말을 들은 소년의 부모는 고민했다. 아이를 병원에 남게 할 것인가, 아니면 집으로 데려갈 것인가, 한 달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아이를 어떻게 보내줘야 할까…. 병원에서 끝까지 치료를 받다가 눈을 감는 아이들을 숱하게 보아온 터였다. 부모는 아이가 평소에 강아지를 키우는 게 소원이라고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달이나마 아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하고, 퇴원을 결정했다.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간 아이는 남은 한 달을 가족과 함께 보내고 강아지를 품에 안고 웃으며 눈을 감았다고 한다.

 다음은 또 다른 사례. 몇 년 전 50대 후반에 간암을 앓다 세상을 떠난 허 교수의 사촌형 이야기다. 몇 년간 치료를 받던 환자에게 말기 상황이 찾아왔다. 말을 꺼내기가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허 교수는 환자인 형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는 얘기를 전했다. 길어야 1~2주일이 될 거 같다고. 열심히 투병생활을 해온 터였지만, 환자는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불필요한 검사는 더 이상 안 하겠다. 꼭 필요한 주사가 아니면 맞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평소에 보고 싶었던 사람들을 전화로 부르기 시작했다.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대학생 딸에게 물었다. 아빠가 뭘 해주면 좋겠느냐고. 딸은 아빠가 술 한잔 걸치고 골목 입구에서부터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던 게 가장 그리울 것이라고 했다. 아빠의 노래를 더 듣지 못하면 아쉬울 거라고. 아빠는 녹음기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그리고 딸을 위해 노래를 불렀다.

 허 교수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은, 말기 상황에서 기술을 동원하면 1, 2주 시간을 더 연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병원에서 끝까지 고통받으며 눈을 감게 하는 게 최선은 아니다.”고 말했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1주일을 1년처럼 보낼 수도 있고, 1년을 하루처럼 보낼 수 있다는 얘기다.


허 대 석

- 1955년생. 서울대 의대 학·석사, 박사
- 미 피츠버그대 피츠버그센터 인스티튜트 연구원 (86~89)
- 서울대 의료정책연구실장(2003~2006)
- 서울대 암센터 소장(2004~2008)
- 서울대 첨단 세포·유전자치료센터장(2006~2008)
- 서울대병원 호스피스실장(98~2010)
- 한국보건의료연구원장 (2008년 12월~2011년 12월)
- 서울대 종양내과센터장(2011년 3월~)

출처: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aid/2012/03/03/7146929.html?cloc=olink|article|default
Posted by 김범석 bhums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