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료실에서만난환자'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1/11/17 선생님, 하지 말라는 말씀만 하지 마시구요… (1) by 김범석 bhumsuk
  2. 2009/05/27 품위 있게 죽고 싶다. by 김범석 bhumsuk
  3. 2009/04/27 삶에 대한 당당함 by 김범석 bhumsuk
  4. 2009/03/22 나는 당신의 진료를 거부합니다 (1) by 김범석 bhumsuk
  5. 2008/12/07 나 살고 싶어요 (1) by 김범석 bhumsuk
  6. 2008/07/24 신문지 줍는 노인 (1) by 김범석 bhumsuk
  7. 2008/06/08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딸래미 by 김범석 bhumsuk
  8. 2008/05/20 신싸이몬을 그리며 by 김범석 bhumsuk
  9. 2008/05/08 불량품 by 김범석 bhumsuk
  10. 2008/05/05 사법고시에 합격한 아들의 췌장암 by 김범석 bhumsuk
  11. 2008/05/03 배속의 아이와 암덩어리 (2) by 김범석 bhumsuk
  12. 2008/05/03 배속의 아이와 암덩어리 (1) by 김범석 bhumsuk
  13. 2008/05/03 에세이- 진료실에서 본 환자 이야기 by 김범석 bhumsuk

선생님, 하지 말라는 말씀만 하지 마시구요

 

 

 

“아니, 선생님. 안된다 하지 말라는 말씀만 하지 마시구요, 그럼 무얼 해야 하는지 말씀을 해주세요”

 

환자분들이 가지고 있는 여러 불만중 하나는 의사들은 하지말라는 이야기만 하지, 도대체 무얼 하라고 이야기는 잘 안해준다는 것이다.   

 

“선생님, 부산사는 우리 딸래미가 이게 그렇게 몸에 좋은거라고 하면서 갖다주는데, 이거 먹어도 됩니까?

“선생님, 미국 사는 친척이 OOO를 먹어야 기운이 난다고 보내주었는데, 어떻게 해야됩니까? 미국의사들이 추천하는 거라고 하던데요.

 

외래를 보다보면 하루에도 몇번씩 이런 질문을 받게 된다. 환자분 입장에서는 한번 질문이지만, 내 입장에서는 수천번 듣는 소리이다. 그리고 이런 질문들은 대개 외래 진료가 끝나고 환자분들이 나가려고 일어나면서 하게 된다.

 

“별 도움 안되요. 드시지 마세요. 괜히 간수치만 나빠져요. 간수치 나빠지면 항암 못해요. 

 

내 외래는 시간이 밀리기 일수여서 (이 기회를 빌어, 진료가 지연되는 것을 기다려 주시는 환자분들께 사과의 말씀과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컴퓨터에는 진료가 지연되고 있다고 빨간 경고화면이 뜨고, 밖에서는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환자분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자세히 설명해줄 시간이 없다. 그래서 대개는 하지 마세요라고 짤막하게 대답을 하곤 한다.

 

 그러면 환자분들은 대부분 실망하는 표정을 짓게 된다. 그나마 나는 의사 선생님 말 잘듣 환자이고 싶고, 선생님 시키는대로 해야할 것 같아서, 이런거 혼자 몰래 먹으면 안될 것 같아서 (한편으로는 허락받고 먹고 싶어서) 말할까 말까 망설이다가 고민끝에 물어본 건데, 의사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하지 말라는 말만 하면, 대부분의 환자분들은 실망하게 되어있다. 이야기안하고 몰래 먹을껄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것이고, 모르긴 몰라도 몰래 드시는 분도 많을 것이다.

 

“선생님, 이거는 비타민이어서 괜찮다고 하던데요.

“선생님, 다른 환자분들이 이거 먹고 엄청 효과를 봤다고 하던데요.

“선생님, 이거 우리딸이 큰맘먹고 비싸게 산건데, 그냥 먹으면 안됩니까.

 

아주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하지 않으면, 많은 경우에서는 이런 식으로 환자분들이 꼭 먹을수 있게 해달라고 하며 읍소를 하기도 한다. 가족과 보호자 입장에서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고, 뭔가라도 환자분께 해주고 싶고, 이것 저것 알아보다가 큰맘먹고 산거니까 너무 그렇게 냉정하게 안된다는 이야기만 하지 말아달라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보호자분들이 환자분을 위해 내가 OO라도 했다라는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은 경우도 있다. 우리 엄마한테 평소에 속만 썩였고, 우리 엄마는 늘 고생만 하셨는데, 엄마가 암에 걸려서 항암치료 받으시는데, 멀리사는 자식된 도리로, 비싼 고가의 건강보조식품이라도 사드려야 자식된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심정도 한 몫한다. 물론 비쌀수록 자식된 도리를 한다고 느끼는 것 같다. 

 

그래도 효과가 입증되어있지도 않고, 잘못하다가는 부작용으로 고생할 것이 우려되는 검증안된 건강보조식품을 드시도록 방조할 수는 없는 없는지라, 의사된 입장에서는 드시지 말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때로는 그것이 환자분들에게는 서운하게 들리는가 보다.

“선생님, 안된다 하지 말라는 말씀만 하지 마시구요, 그럼 무얼 해야 하는지 말씀을 해주세요.

 

그럴 때면, 나는 간혹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지 마시고, 그럼 제가 숙제를 내줄께요. 2주뒤에 저랑 다시 외래에서 뵐텐데요, 2주간 엄마랑 매일 30분간 같이 시간보내세요. 걷기 운동 같은거 하셔도 좋구요”

“저는 직장 다녀야 해서 엄마랑 매일 시간을 보낼수가 없어요.

“퇴근후에 하면 되잖아요. 그것도 못하면서, 비싼 건강보조식품만 사서 엄마 먹이면, 그게 효도인 것 같아요?

이렇게 무안을 주면, 대부분은 더 이상 말을 안 꺼낸다. 

 

환자분을 위하는 길은 어려가지가 있다. 외래에 같이 와주는것, 비싼 건강보조식품 사드리는것, 치료비를 대신 내드리는 것이중에서 가장 으뜸은

아마도 힘들 때 옆에 있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안된다 하지 말라는 말씀만 하지 말고, 그럼 무얼 해야 하냐고 물어보는 분들께, 나는 환자분과 그냥 같이 시간을 보내라고 이야기한다.

생각보다 함께 보낼 수 있는 남은 시간이 길지 않을 수도 있기에

 

 

 

Posted by 김범석 bhumsuk

품위 있게 죽고 싶다

그는 70세의 폐암 환자였다. 진단 받을 때부터 간과 뼈에 커다란 전이가 있었다. 전이가 있는 4기이기 때문에 수술은 불가능했고, 완치를 바라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환자 본인과 가족들은 환자분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였고, 생명연장과 증상완화의 목적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평생 교직에 있었다는 환자분은 항암치료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의료진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항암치료는 비교적 잘 견뎠다. 항암치료 시작 후 줄어들기 시작했던 암 덩어리는 항암제에 금새 내성이 생겨서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두번째 항암제로 바꾸었으나 그마저도 잘 듣지 않았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 했던 것은 세번째 항암제를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그는 숨이 차서 응급실로 왔고, 가슴 X-ray에는 양쪽 폐에 떡하니 폐렴 소견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기는 세균성 폐렴과는 완연히 다른 양상이었고, 젬자라는 항암제로 인해 생긴 약인성폐렴이 의심되었다.

환자의 호흡수는 40회가 넘었고, 산소를 최대한으로 공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소 수치는 70%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환자의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해 몇시간 안에 돌아가실 것이 뻔했다. 가족들을 불러모아 상황을 설명 드렸다.


 상황이 매우 안 좋은데요, 중환자실 갈지 말지를 지금 정해야 할 것 같아요. 환자분은 워낙 폐암이 있었던 데다가 지금 양쪽 폐에 폐렴이 오면서 갑자기 호흡곤란이 생겼어요. 문제는 폐가 기능을 못해 산소교환이 안 되는 점이에요. 사람이 숨을 못 쉬면 바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인공호흡기를 달지 못하면 오늘을 못 넘기고 돌아가실 것 같아요. 그런데, 인공호흡기를 단다고 해서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다고 장담하진 못해요. 또 설령 이번 고비를 넘긴다고 하더라도 이미 암이 진행된 상태여서 얼마나 더 사실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요. 그간 환자분이 항암치료에 잘 듣지 않았던 편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여기에서부터는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족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중환자실 갈지 말지를 정했으면 합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치료를 받았던 보호자들은 망연자실했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냐며 따지는 보호자도 있었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며 나에게 되묻는 보호자도 있었다. 환자에 대해 유난히 극진했던 보호자들은 결국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해달라며 중환자실 행을 택했다.

 그 길로 환자분은 인공호흡기를 단 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온갖 항생제와 약병들이 주렁주렁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폐렴은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인공호흡기를 매달고 2주가 지나자 기관절제술을 받아야 했고, 인공호흡기로 인한 새로운 폐렴도 생겼으며, 콧줄에서는 간간히 위장출혈 소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의식 없이 누워있는 환자분에게 면회를 와서 조용히 울다 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급기야 심장 정지가 왔고 1시간이 넘는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환자분은 돌아가셨다. 인공호흡기로 인해 목에는 구멍이 뚫리고, 팔다리에는 정맥주사 자국이 낭자하고, 심폐소생술하며 갈비뼈는 죄다 부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환자분은 임종을 맞이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가족들이 지켜보지도 못하는 가운데서 


 지금의 시점에서 되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때 중환자실에 가도록 한 결정이 잘 한 결정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응급실에 왔었을 때 그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도록 해드렸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머리 속에 계속 맴돌았다. 만일 사후세계라는 것이 있어서 그 환자분의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면, 아마도 고맙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을 것 같다.

 

중환자실에서 있었던 2주가 넘는 시간들. 누구를 위한 생명 연장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연장된 시간이 과연 환자분과 가족들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였던가.

그것이 환자분에게 어떤 고통을 초래하는 지와 상관 없이 어떠한 치료라도 다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는 가족의 시각. 그리고 죽음을 치료의 실패로 바라보는 의료진의 시각. 여기에 할 만큼 해놔야 나중에 소송 걸리지 않는다는 방어진료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나중에 환자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보호자들이라는 ‘진료 편의주의’. 이런 것들이 맞물리며,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해야 할 환자분들이 고통 속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에서는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들을 놓고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그렇게 환자 본인의 생사를 다루는데, 정작 환자 본인의 의지는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명을 연장해 보겠다는데, 막상 그 사람은 연장되는 본인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왜 고민하지 않고 있을까? 의료진이나 보호자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환자 분들에게 생명연장이라는 포장에 쌓여진 고통만 드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Posted by 김범석 bhumsuk

삶에 대한 당당함  

 

얼마 전 어느 병원의 유방암 환우회로부터 항암치료에 대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의과대학 동기가 근무하고 있던 병원이었는데, 친한 친구의 부탁인지라 선뜻 강의 승낙을 하였다. 그러나, 그때부터 고민에 고민이 시작되었다. 무슨 내용을 어떻게 이야기 해야 할 것인지, 어느 정도 전문적인 내용을 섞어서 강의를 해야 하는지 막연해서였다. 심지어 환우회에 오는 환자들은 무엇에 관심이 가장 많고, 무엇을 얻고 싶어서 강의를 들으러 오는 것인지조차 나는 잘 몰랐다. 


 모든 암환자들은 처음 암을 진단 받고 나서 깊은 충격에 빠진다. 암이라면 영화나 소설 속에 나오는 병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암에 걸리다니. 게다가 영화 속 비운의 주인공들이 암에 걸리면 꼭 얼마 못살고 죽지 않던가. 얼마 못살고 죽게 되다니 서러운 마음에 울고 또 울고내가 무얼 잘못해서 그랬나 생각해보고그러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범했을 만한 과거 속의 티끌만한 과오라도 찾아내면 그것 때문에 병에 걸렸나 죄책감에 또 울고남겨질 아이들 생각하면서 또 울고 


 환자분들이 첫 슬픔으로부터 벗어나는데, 스스로의 의지와 가족의 도움도 중요하지만, 동료 암환자들의 역할도 상당히 크다. 그런 면에서 환우회는 서로를 위안할 수 있는 자조모임이자, 동료 암환자들로부터 생생한 조언을 받을 수 있는 좋은 모임이기도 하다. 이러한 환자분들 모임에서 내가 무엇을 이야기 하면 좋을까. 고민 끝에 생각했다.


 ‘
그래. 항암치료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암환자라고 해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살자는 메시지를 이야기 해보자.’

그런 당당함과 자신감이야 말로, 힘든 치료를 이겨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강의 당일.

항암치료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내었다.


 “
암환자라고 기죽지 말고, 항상 당당하게 사세요. 대중목욕탕에도 가시구요.”

유방암 환자분들은 한쪽 유방을 도려내기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목욕탕에 가기를 대부분 꺼려한다. 가슴의 상처를 드러내는 것도 부끄럽고, 그걸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부담되는 탓이다.


혹시나 싶어서 환자분들에게 물어보았다.

 “
목욕탕에는 가세요?”


 그러자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모두 환한 얼굴에 우렁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 목욕탕에 자주가요.”


그랬다. 오히려 당당하지 못했던 것은 나였고, 그 밝음과 당당함에 압도당했다.  


 암은 그녀들의 가슴을 할퀴고 지나가, 아름다운 여성성을 도려내고 거친 칼자국만 남겨 놓았다. 하지만, 가슴의 상처마저 훈장으로 바꾸어 놓은 것을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그녀들의 마음 가짐이었다. 그녀들이 당당하지 못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생각한 나의 편견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자신의 아픔을 당당하게 승화시키는 그녀들의 모습에 박수를 보낸다.  


Posted by 김범석 bhumsuk
제8회 <장려상> 나는 당신의 진료를 거부합니다
김범석 (국립보건연구원 공보의)
등록 : 2009-03-05 11:40
제8회 한미수필문학상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수희 씨는 예쁜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참 고왔던 환자였다. 6년 전 그녀는 임파종 진단을 받기도 했지만, 항암치료를 받는 등 열심히 투병생활을 한 끝에 완치 판정을 받았다. 그렇게 암을 극복하고 나서는 원하던 공부를 마쳤고 얼마 전에는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해서 알콩달콩 재미난 신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혼의 단꿈에 젖어있던 그녀에게 갑작스레 찾아온 손님은 ‘목의 통증’이었다. 수희 씨는 병원에 오기 두 달여 전부터 목이 아팠었는데, 어느 날 입을 벌리고 거울을 통해 목 안을 들여다보니 편도 뒷부분으로 툭 튀어나온 덩어리가 보였다. 이런 경우 누구나 짐작하듯 가장 걱정되는 것은 암의 재발이다. ‘병원에 갔다가 암이 재발된 것이라고 하면 어떻게 하나….’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끌 수는 없는 노릇인데….’ ‘하필이면 결혼해서 이제 잘 살아보려는데….’ 그녀와 가족들은 겁이 나서 한참을 망설인 끝에야 다시 병원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그녀의 목을 들여다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암이 재발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얼핏 보기에도 편도 뒷부분에 생긴 덩어리가 꽤 컸고, 경계도 불분명한 것이 양성은 아닌 듯 보였다. 이런 경우 예전에 치료받은 임파종이 재발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임파종과는 다른 새로운 암이 생긴 것일 수도 있다. 우선 조직검사를 해서 암세포가 있는지를 알아봐야 했다.

 수희 씨 인생에서 참 길었을 며칠이 지났고 검사결과가 나왔다. 예상대로 암세포가 발견됐으며, 조직검사 결과지에는 ‘임파종’이라고 적혀 있었다. 예전과 같은 유형의 임파종인지 아니면 새로운 유형의 임파종인지는 몇 가지 특수면역검사를 거쳐야 알 수 있다고도 쓰여 있었다. 어찌됐든 ‘암’이라는 점은 확실했다. 당시 나의 변함없는 지론은 환자 본인에게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고, 더욱이 수희 씨는 똑똑하고 젊은 환자였다. 나는 검사결과로 나온 내용 전부를 수희 씨에게 자세히 설명했다.

“수희 씨, 오늘 결과가 일부 나왔어요.”
“암인가요?”
“네.”

 이 짧은 대화 뒤에 우리 사이에는 오랜 침묵이 흘렸다. 참 짤막한 대화였지만, 그 대화 속에서는 모든 것이 오고 갔다. 나는 말을 이었다.

“암 덩어리가 편도 뒤에 있고, CT 결과로는 목쪽 임파절까지 있는 것 같아요. 병리과 교수님 말씀으로는 임파종이 맞기는 맞는데, 어떤 종류의 임파종인지, 지난번 임파종과 같은 유형인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특수염색검사가 필요하다고 하시네요. 최종적으로는 특수염색검사 결과가 나와야 확진이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암이 맞기는 맞네요. 그 사이에 뇌 척수액 검사를 해 볼게요. 이 병이 뇌 척수액으로도 잘 가기 때문에 그래요.”

 검사결과를 설명한 뒤, 병실 문 밖을 나서자 그녀의 어머니는 나를 쫓아 나와서 정말로 확실한 거냐고 몇 번이고 되물었다. 이런 때가 의사로서 가장 괴로운 순간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의 어머니는 복도에서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의 어머니에 의하면 수희 씨는 너무나 착하고 예쁜 딸이었다고 한다. 키우면서 단 한 번도, 정말 한 번도 엄마, 아빠 속을 끓여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사려 깊고 마음 씀씀이도 고와서 어릴 때부터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고, 학교 다닐 때는 공부도 무척 잘했다고 했다. 며칠 수희 씨를 대해본 내가 보기에도 정말 그랬을 것 같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착하고 예쁜 딸이 바로 수희 씨였다.

 그날 밤이었다.  

“주치의 나오라고 해!”

  병동에서 밀린 차트를 정리하고 있는데, 병동이 시끄러워졌다. 스테이션으로 나가보니 TV에서 보던 낯익은 탤런트가 내 이름을 부르며 난리를 치고 있었다. 병실에서 한 번도 본 적은 없었지만, 간호사들을 통해 수희 씨 아버지가 중견탤런트라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지금 스테이션에 있는 그가 바로 수희 씨의 아버지였던 것이다.

“니가 주치의냐? 니가 우리 수희 주치의냐고! 니가 의사야? 니가 의사냐고!!! 너 같은 XX가 의사냐! 너는 의사할 자격이 없는 XX야!”

 온갖 험악한 육두문자가 날라 오고, 벌건 얼굴에 술냄새를 풍기며 그가 행패를 부렸다. 그는 나를 밀치고 내 멱살을 잡으려 했다. 한참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경비아저씨들이 출동해서 제지하고 나서야 사태는 일단락됐다. 그는 경비아저씨들에게 질질 끌려 나가면서 마지막으로 정색을 하고 말했다.

 “나는 당신의 진료를 거부합니다. 우리 딸 내일 퇴원시킬 테니 그렇게 아시오!”

 사실 의사들은 이런 일을 종종 겪는다.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보호자들에게 맞는 일도 생긴다. 이런 일을 겪고 나면 잘잘못을 떠나 기운이 빠지고 기분이 참 씁쓸해진다. 어떤 때에는 참 더럽고 치사해서 의사짓거리 못 해먹겠다는 생각도 든다. 나도 나름대로 곱게 자란 사람인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이렇게 보호자들에게 맞으면서까지 의사짓을 해먹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런데 이 날의 경우에는 도대체 보호자가 무엇 때문에 저렇게 화가 났는지 곰곰히 생각해 봐도 알 수가 없었다. 홀로 병동에 앉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는 것 같았고, 잘못이 없는데 이런 일을 당했다고 생각하니 기운이 빠지면서 무척 힘들었다.

 다음날 아침. 수희 씨에게 회진 가니 수희 씨와 어머니가 안절부절 못하며 나를 맞이했다.

“선생님, 어제 우리 애 아빠 때문에 너무 죄송해요. 뭐라 드릴 말이 없어요. 어제 우리 집 양반이 ‘암 덩어리’라는 말에 하도 속상해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제야 어느 정도 상황파악이 됐다. 문제의 발단은 문제의 발단은 내가 수희 씨에게 설명을 할 때 ‘암 덩어리’라는 단어를 사용했던 것이었다. 전날 내가 결과를 설명해 주기 위해 병실에 노크를 하자, 그 중견탤런트는 혹시라도 의사가 와서 안 좋은 소리할까봐 가슴이 떨려 화장실로 숨었고, 그렇게 내가 수희 씨에게 직접 설명하는 것도 듣게 된 것이었다. 그 중에 수희 씨 상태에 대해 설명하면서 사용했었던 ‘암 덩어리’라는 단어가 대못이 되어 중견탤런트의 가슴에 박혔나보다. 

 “우리 집 양반이 어제 울었어요. 병이 재발한 것도 속상한데 어제 선생님이 암 덩어리라고 해서 그게 그렇게 마음 아팠나봐요. 암세포도 아니고 암 덩어리라니… 어떻게 의사라는 사람의 입에서 그렇게 험악한 단어가 나올 수 있냐며, 도대체 그게 의사가 할 말이냐며… 우리 집 양반이 어제 그것 때문에 속상해서 울었어요. 생전 우는 법이 없던 양반인데 어제는 울더라고요.”

 나이 예순의 그 중견탤런트는 평소 씩씩하고 늠름한 배역을 주로 맡았는데, 수희 씨가 입원해 있을 당시에도 전쟁을 지휘하는 용감한 장군역으로 TV 사극에 출연 중이었다. 하지만 현실 속의 그는 극에서의 모습과는 달리 무척이나 마음이 여렸고 소심한 사람이었다. 또 딸에 대한 사랑이 아주 지극해서 수희 씨가 암으로 진단 받자 아예 병원 근처에 방을 구하기도 했고, 녹화가 없는 날에는 병원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병실에서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의사의 입에서 혹시라도 나쁜 이야기가 나올까 무서워서, 그는 의사만 보이면 숨었던 것이다. 복도에 있다가 멀리서 담당 의사가 오는 것 같으면 계단 쪽으로 숨었고, 병실 안에 있을 때는 누군가가 병실 문을 노크하고 회진 오는 것 같으면 재빨리 화장실에 들어가 몰래 숨었다.

 그날도 화장실 안으로 숨었다가 암이 재발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이어서 ‘암 덩어리’라는 말도 듣게 되었다. 한마디의 말에 상처 받은 그는 너무나 가슴이 미어져 화장실에서 혼자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슴에 못내 사무쳤는지, 밤늦게 술을 마시고 와서 그날 병동에서 난리를 피운 것이었다.

 내 입에서 나온 ‘암 덩어리’라는 단어가 결국 사건의 화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그 후에는 설사 그가 병실에 없더라도 단어 하나하나에 신경을 기울여가며 조심하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화장실에 숨어서 듣고 있을지 모르는데, 또다시 그의 마음에 상처가 되는 말을 하게 될까봐 한마디 한마디에 무척 신경이 쓰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저기 멀리서라도 내가 보이면 슬금슬금 피했고, 끝내는 나와 마주치지 않았다. 나도 억지로 그와 마주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의 마음은 이미 수희 씨를 통해서 충분히 알았기 때문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쪽같은 딸내미가 아파서 힘겨워할 때 홀로 서럽게 가슴을 찢으며 울었을 아빠의 마음, ‘암 덩어리’라는 단어에 상처 받아 혼자 숨어서 울부짖었을 아빠의 마음을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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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김범석 bhumsuk

나 살고 싶어요

 

 

대한민국의 의사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그라목손이라는 약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진녹색의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이 약은 제초제이고, 사람들이 자살할 때 즐겨 찾는 약 중 하나이다. 몇 십알 먹어도 죽지 않는 어설픈 수면제와 달리 그라목손은 단 한 모금만 마셔도 치사율이 100%에 달한다. 심지어 청바지에 한방울만 튀어도 청바지에 구멍이 난다. 그래서 대한민국의 의사라면 그라목손이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기 마련이다. 나 역시도 여태까지 그라목손을 먹고 살아난 사람을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치사율 100%. 하지만 의사들이 그라목손을 싫어하는 다른 이유는 치사율이 높아서가 아니다. 그라목손이 사람을 죽이는 방식이 아주 잔인하기 때문이다.

 


 몇 년전 유채꽃이 만발한 어느 해 4. 제주도에 파견 근무 나갔을 때 일이었다. 병동 회진을 돌고 있는데, 응급실 인턴 선생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가 왔다.

 

선생님, DI 환자가 왔는데요, 그라목손을 먹은 것 같습니다.”

서둘러 응급실에 내려가 보니, 다들 위세척을 하느라고 분주했다. 인턴 선생님과 간호사들은 중년 남자에게 콧줄을 꽂고 엄청난 양의 생리 식염수를 들이 붓고 있었고, 남자는 구역질을 견디다 못해 몸을 버둥거리고 있었다. 환자는 제발 나를 가만히 놔달라는 것인지 극렬히 저항했고, 덩치 좋은 남자 간호사가 못 움직이게 환자 몸을 꽉 붙잡고 있었다. 세척된 위액들이 쏟아져 응급실 바닥이 흥건하게 젖어 있었고, 한 아주머니가 119 구급대원의 부축을 받은 채 서서 그 광경을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 중년 남자는 제주도에서 농사를 짓는 평범한 농부인데, 병원에 오기 전에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 것을 부인이 발견해서 응급실로 모시고 왔다고 했다. 부인의 말로는 방안에는 소주병과 농약병이 뒹굴고 있었고, 아저씨는 입에 거품을 문채 쓰러져 있었다고 했다. 


 함께 온 119 구급대원은 익숙한 솜씨로 장갑 낀 손에 빈 농약통을 보여주며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고 있었다. 농약병에는 그라목손 이라고 쓰여 있었고, 병 아래쪽에는 주의; 한 모금만 마셔도 사망할 수 있습니다. 절대 마시지 마십시오라는 경고 문구가 해골무늬와 함께 쓰여져 있었다.


 한참 위세척을 하던 인턴 선생님은 응급실에 내려온 나를 보자 환자 상태에 대해 보고했다.

선생님 위세척은 거의 다 했고 더 이상 나오는 것은 없습니다. 냄새를 보니 그라목손이 맞습니다. ”

4월 인턴이면 아직 임상경험이 없는 초짜 중의 초짜여서, 환자에 대해 보고할 때도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일관하기 마련인데, 인턴 선생님 입에서 확신에 찬 어조로 그라목손이라는 말이 나왔다. 그라목손이라는 것은 굳이 말 안 해도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응급실에 들어서면서부터 풍겨 나오는 그라목손 냄새를 나도 맡았기 때문이었다. 그라목손의 냄새는 무척 고약하고 역겨운 냄새인데, 한번만 맡아 보면 누구나 그 냄새를 평생 잊지 못한다.

 

보호자분 잠깐 뵐까요?”

응급실에서 의사가 환자를 보았다면 우선 치료부터 할 일인데, 이 경우는 사정이 좀 달랐다. 치료 보다 보호자에게 경고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환자분은 드셔서는 안될 치명적인 농약을 드셨습니다. 그라목손이라고 혹시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네요. 위세척한 내용물을 보기에도 이미 많은 양을 드신 것 같구요. 치사량 이상을 드신 것 같습니다. 오래 못 버티고 돌아가실겁니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어안이 벙벙해 있던 아주머니는 한참이 지나서야 상황이 파악된 듯 나를 붙잡고 울며 불며 통사정 하기 시작했다.


워매 어쩐다냐~ 선생님 살려주십서. 제발 우리집 양반좀 살려 주십서.”

아니요. 죄송합니다. 돌아 가실 겁니다. 100% 돌아가십니다.”

의사라는 나는 저승사자들이나 쓸 법 한 말을 내 뱉었다. 죽음의 저주도 아닌데, 의사 입에서 나오는 말이 100% 돌아가실 거라니그렇게 살려달라는 아주머니와 돌아가실 거라는 나 사이에 우격다짐이 벌어졌다. 아주머니는 반드시 살려 내라고 우기고 있었고, 나는 반드시 돌아가실 거라고 우기고 있었다. 몇번의 실랑이가 오간 끝에, 아주머니는 결국 바닥에 드러누워 대성 통곡을 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제서야 환자에게 줄 약을 처방하러 병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는데 죽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에요! 안 그래요? 여보! 뭐라고 말 좀 해봐요.”

아주머니는 환자분을 붙잡고 울부짖었고, 위세척을 마친 후 환자복으로 갈아입은 환자분도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두 부부는 그렇게 서로 부둥켜 안은 채 한참을 울었다.


 곧이어 형님이라는 사람이 왔고, 소식을 들은 다른 친척들도 병원에 도착했다. 멀뚱 멀뚱하게 누워있는 환자는 형님을 보자 마자 부둥켜 안고 울기 시작했다. 친척들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며 주치의인 나를 찾아댔고, 나는 살려달라는 친척들에게 또다시 같은 설명을 반복해야만 했다. 의사로서 못할 짓이었다.

 

 나중에 주변 사람들을 통해 들은 사연은 이러했다. 환자분은 농사를 짓다가 약간의 빚을 지게 되었다고 한다. 농사라는 것이 워낙 예측이 어려운 일 중에 하나라서 흉년이 들 때도 있고 예상치 않은 자연재해가 닥칠 수도 있다 보니, 우리나라 농부들 치고 약간의 빚이 없는 농부는 없을 정도이다.


 문제는 카드였다. 돈이 급하게 필요할 때 서민들이 가장 손쉽게 부담 없이 소액의 돈을 구할 수 있는 것이 대한민국에서는 카드라는 것이다. 하지만 카드라는 것이 처음에는 부담없어 보여도 어쨌거나 사채의 일종인지라, 결국에는 시간이 지나면 배보다 배꼽이 커지는 일이 흔히 발생한다. 환자분 역시 마찬가지로 돈이 모자라서 카드로 돌려 막다가 빚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고 한다. 더 이상 카드로 돌려막기가 어려워지자, 환자분은 다른 채무자들이 으레 그렇듯이 가족에게 손을 벌리게 되었다. 환자분은 하나밖에 없는 형님에게 돈을 빌려달라는 이야기를 어렵게 꺼냈고 한다. 본디 순한 성품 때문에 평소 가족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던 그였는데 말이다.  여기에서 돈을 빌려 주었더라면 별 문제가 없이 사태는 일단락 되었을 지 모른다.


 하지만, 형님은 카드빚을 막아달라는 동생의 부탁을 외면했다. 아마도 추측컨대 형님은 동생이 술값으로 카드를 막 써댄 것쯤으로 여겼던 것 듯 싶다. 믿었던 형님이 냉담하자 그는 당황했을 것이다. 돈 나올 구멍이 없어지고 돈을 갚아야 하는 날이 다가오자, 모든 채무자가 마찬가지이듯 그도 다급했을 것이고 절망적이었을 것이다. 


 그럴 때 마음을 달래주는 가장 좋은 친구는 술이다. 그렇게 속상한 마음에 술을 먹다가 홧김에 눈에 띈 것이 농약병이었고, 더러운 세상 에잇 먹고 죽자는 마음에 술김에 농약병을 들이켰다. 허무하게도 그게 사연의 전부였다.

 

동생의 자살이 자신과 관련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아서였는지 그 형님은 동생의 치료에 적극적이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려야 한다며 주치의인 나를 다그쳤다. 도저히 방법이 없는 거냐며 나를 붙잡고 통사정 했다. 그나마 그라목손에 약간의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치료로 헤모퍼퓨전이라는 것이 있기는 있다. 하지만 효과가 너무 미미하고, 가격도 너무 비싸서 수백만원에 이르는 고가의 치료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형님에게 이 치료를 받아보겠냐고 물었더니 형님은 돈에 상관없이 다 해달라고 했다. 효과가 거의 없을 지도 모른다는 주치의의 설명에도 말이다.


 결과적으로 모르긴 몰라도 결국 형님이 병원비로 쓴 돈은 동생이 빌려달라고 했던 돈 보다 많았던 것 같다. 자살기도를 하는 경우 의료보험 적용이 되지 않아 진료비 전액을 환자 본인이 부담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무슨 인생의 우여곡절이란 말인가

 

미안해다 내가 못난 탓이야.”

형님을 끌어안고 한참을 울다가 환자는 한마디 했다.

 

그라목손이 잔인하다는 이유는 여기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라목손을 먹으면 일반적으로는 바로 목숨이 끊어지지 않는다. 그라목손을 먹고 나서 바로 고통 없이 죽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폐를 파괴하며 숨차게 만들어서 사람을 말려 죽인다. 숨이 차는 증상이 나타나기 전에는 의식도 멀쩡하고 보통의 상태로 돌아오는데, 그렇게 며칠이 지나면 서서히 그라목손이 숨줄을 죄여오기 시작하고, 그렇게 숨이 차는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게 된다.


 다른 환자들과 마찬가지로 위세척등 응급 조치가 끝난 후 그는 다시 멀쩡한 사람으로 돌아왔다. 멀쩡한 의식과 판단력을 가진 평소의 그의 모습으로 말이다. 다만 환자복을 입고, 몸에 주렁주렁 링거병을 달고, 중환자실에서 멀뚱 멀뚱 누워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그라목손을 드신 환자분들은 이 시기에 보통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나는 지금 이렇게 두눈 멀쩡히 뜨고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있는데, 의사들은 나보고 자꾸만 죽는다고 한다고


 의사로서도 죽기 전까지 며칠간은 멀쩡한 제정신으로 살아있는 환자와 마주쳐야 한다. 해줄 것도 없는데, 멀쩡히 두 눈뜨고 있는 환자를 봐야 한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처음 응급실에서 볼 때는 몰랐었는데, 환자복으로 갈아 입히고 말끔히 씻겨 놓고 보니, 그는 그냥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시골 아저씨였다. 농사꾼 특유의 구릿빛 얼굴과 굵은 손,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순한 눈망울을 가진 보통의 평범한 농사꾼이었다. 이런 순박한 사람이 어쩌다가 그라목손이라는 극약을 입에 댔을까 의아스러웠고, 어쩌다가 카드 빚에 손을 대어 이지경이 되었는지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알아보았는지, 그라목손 치료로 유명하다는 S병원으로 전원을 요구하였다. 다 소용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마지막 지푸라기라도 잡아 보겠다는 가족을 말릴 수는 없었다. 나는 소견서를 작성하였고, 다음날 항공편으로 환자를 이송하기로 항공사에 이야기 해두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 시기였다. 그날 오후부터 환자는 서서히 나빠지고 있었다. 환자분의 산소 수치는 점점 떨어지고 있었고, 폐가 손상되면서 점점 호흡곤란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소변도 안 나오기 시작했다. 환자분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이미 팔할쯤 넘어섰고 있었다.

 
 전원을 앞둔 전날 밤. 산소 수치가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인공호흡기를 단다고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으면 지금 임종하는 것이었고, 인공호흡기를 단다면 예정된 죽음을 다만 며칠 뒤로 미룰 수 있을 뿐이었다. 보호자들은 물론 인공호흡기도 달고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달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인공호흡기를 달기 위해 기도삽관을 준비하고 있는데, 숨이 차서 괴로워하며 그가 나의 가운을 툭툭 치며 손짓을 했다. 그러더니 갈라지는 목소리로 숨차하면서 간신히 입 밖으로 말 소리를 내었다.


.. 선생님,   살고 싶어요.”


뒤돌아 보니 그는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에게 말을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 살려주세요.”


 그게 그의 마지막 말이었다. 더 이상 호흡이 유지가 안되어서 그는 인공호흡기를 달아야만 했고, 며칠 뒤 그는 예정된 수순대로 숨을 거두었다. 그 때의 무기력함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자살하는 사람이 초지일관 변함없이 죽겠다고 마음 먹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다. 순간적으로 욱하는 마음에 죽으려고 약을 먹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시 생각해보면 죽는 것도 부질없는 일 같고 서서히 살고 싶다는 의지가 생겨나게 되는 경우가 더 많다. 하지만, 그라목손을 먹게 되면 거기서부터 말 못할 고통이 시작된다. 그라목손은 그런 사람들의 변덕스런 마음을 비웃기나 하는 듯이, 그때부터 서서히 숨차게 만들며 처절한 고통 속에 사람을 말려 죽인다. 그라목손을 먹고 나서, 이게 아니니 이제는 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날 즈음에서부터 그라목손은 사람을 말려죽이기 시작한다. 그래서 의사들은 살려달라는 애원하는 환자들이 서서히 죽어가야만 하는 모습을 손 놓고 지켜봐야만 하게 된다.

 
 사정이 이러다 보니 많은 의사들은 많은 연구비를 들여 그라목손에 대한 효과적인 치료법을 연구하고 있다. 고용량의 비타민요법, 특수 혈액투석 등등 다양한 치료 방법이 이 순간에도 시도되고 있다. 하지만, 그 연구 결과들은 일부 효과가 있긴 있으나, 그 효과가 너무나 미미하여 비싼 돈을 들여 그런 치료를 해야 하나 하는 회의감 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다 보니 서유럽 일부 국가에서는 아예 그라목손을 판매금지 시키기도 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아직 그러지 못하고 있다.


 혹자는 본인이 죽으려고 농약을 마신건데, 여기에까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겠냐고 말하기도 한다. 오죽했으면 죽음을 택했겠냐고, 죽음을 택한 개인의 의사도 존중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라목손을 마신 환자들의 많은 경우가 충동적인 경우이다. 홧김에 속상해서 술을 먹고 우연히 눈에 띈 농약을 마시고 병원에 실려온다. 그리고 잠깐 멀쩡해 지는 순간 후회를 한다. 당신은 곧 죽을 거라는 의사 앞에서 살고 싶다며 어떻게 해서든 살려 달라고 말한다. 이런 환자들 앞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나는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Posted by 김범석 bhumsuk

신문지 줍는 노인

 

 

매일 같은 시간 지하철을 타고 출근을 하다 보니, 지하철 안에서 제법 안면이 있는 사람이 있다. 그 중 하나는 매일 나와 같이 지하철을 타서 신문지를 줍는 자그마한 체구의 할아버지이다. 그 할아버지는 구멍이 송송 난 초록색 등산용 조끼에 모자를 쓰시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칠부 반바지에 운동화 차림이시다. 일흔을 조금 넘긴 듯 보이는 그 할아버지를 지하철 안에서 나는 매일 만난다.

 

그 할아버지는 키가 작아 손이 선반 위에 잘 닿지 않기에 다른 할아버지에 비해 힘들게 일하는 편이다. 행여나 젊은 사람들이 무신경하게 선반 깊숙히 신문을 던져 놓았다면 할아버지는 한 손으로는 철기둥을 잡고 두발은 까치발을 한 채 나머지 한 손을 선반위로 쑥 집어넣어 닿을 듯 말듯한 무가지를 잡아 내려 바둥거려야 한다. 그렇게 힘겹게 신문을 잡아 냈다가 손이 내려오면서 행여라도 옆에 서있는 젊은 아가씨의 팔에 신문이 스치기라도 했다면 예쁘게 차려 입은 아가씨는 인상을 쓰며 한 손으로 할아버지와 스쳐 지나간 옷가지를 탁 탁 털어내곤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어디 다른 신문지 없나 두리번 거리며 또 다시 신문지를 찾아 나선다.

 

원래부터 그런 일 따위에는 자존심이 상해하지 않았던 사람인지 아니면 이런 일을 오래 하다 보면서 무감각 해진 것인지 나로서는 알 재간이 없다. 할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의 시선도 감내해야만 하는 삶의 현실로 받아들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그런 저런 남의 시선에 신경쓰다가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점을 오랜 세월을 통해 계셔서 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해서 할아버지가 애타게 찾아 다니는 것은 젊은 사람들이 읽고 버린 지하철 무가지. 오전 내내 신문지를 모아서 버는 돈은 삼천원 정도 라고 한다. 그나마도 요즘에 파지 줍는 노인들이 많아져서 종이값을 후하게 쳐주지 않는다고 한다. 삼천원이면 젊은 사람들 기분 내킬 때 커피전문점에서 마시는 커피한잔 값만 못하다.

 

할아버지도 살아온 세월 만큼 자존심도 있고, 나이도 있고, 아는 사람들도 있을 텐데... 지하철에서 무가지를 줍다가 행여 아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마음이 들수도 있을 텐데 그런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할아버지는 아침 일찍 삼천원을 벌기 위해 노구를 이끌고 지하철을 타신다.  

 

자존심, 나이, 그런 것보다 현실의 삼천원이 더 큰 가치를 갖는가 보다. 하긴 자존심이 밥먹여 주는 것도, 나이 많다고 해서 누가 밥먹여 주는 것도 아니기 않던가. 젊었을 때 평생을 바쳤을 직장도, 눈에 넣어 아프지 않았던 자식도 늙어서 돈 없는 것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 없는 일이다.

 

노년기의 삶이 그러하다는 것은 꽤나 슬픈 일이다. 남들은 연금이니, 월세수입이니, 자식들이 보내주는 생활비니 하는데, 할아버지에게는 남의 나라 일이다. 아파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삼천원 벌이도 못할 텐데, 그럼 누가 나를 돌볼 것인가 하는 일이 할아버지에게는 더 현실적인 일일지 모르겠다.

 

 글쎄 굳이 가정하고 싶진 않지만 내가 할아버지의 처지라면 어떨까. 살만큼 살았는데 그냥 딱 눈감고 한강다리 가서 죽어 버리릴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힐 지도 모르겠다. 희망이 없이 하루 하루 단돈 삼천원을 위해 고된 몸을 이끌고 젊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다니면서 지하철을 헤집고 다닐 용기가 나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매일 할아버지를 변함없이 지하철로 오게 만드는 그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무엇은 과연 삼천원과 맞바꾸어질 만한 가치밖에 없는 것일까

 

 88만원 세대라고 불리 우는 요즘 젊은 사람들의 앞날도 우울하기 그지 없지만, 하루에 삼천원을 벌기위해 아침부터 버둥거리며 열심히 지하철에서 파지를 줍는 할아버지를 보면 산다는 것이 서글프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 따라 그 할아버지의 모습이 왠지 낯익게 느껴진다.  그리고 내일 부터는 지하철 입구에서 무가지를 여러 개 집어 와야 겠다 생각해 본다.

Posted by 김범석 bhumsuk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딸래미

내가 경호씨(가명)를 처음 본 것은 내과 인턴을 돌던 시절이었다. 처음 방에 들어선 순간 가장 먼저 와 닿은 것은 심한 악취였다.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시큼한 썩은 냄새와 반쯤 비린 생선 냄새가 방안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에게 다가가서 처음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다시 한번 주춤했다. 기형적으로 변해버린 그의 얼굴이 때문이었다.

그의 얼굴 왼쪽 절반은 벌겋게 부어있었고, 왼쪽 상악골에 연해서는 주먹만한 암덩어리가 혹 처럼 달려있었다. 상악골의 암 덩어리는 왼쪽 눈을 밀고 들어와서 눈이 튀어 나와있었다. 암 덩어리의 일부에서는 썩어서 새까맣게 변해가고 있었고, 썩은 덩어리 주변으로는 노란 고름이 흘러 나왔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피부를 통해 코에도 전이가 되었는데, 엄지손가락 절반 정도의 크기의 불규칙한 형태의 붉은 덩어리들이 코에 얹혀져 있었다. 흡사 동화책 속에 나오는 마귀할멈 코처럼 괴상하고 길쭉한 모양이었다. 코에 얹혀져 있는 암 덩어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피노키오의 코가 자라듯이 계속 자라났다고 한다.

원래 의사는 이런 저런 험한 모습을 많이 보게 되는데, 의사인 나도 그의 얼굴을 처음 보고 너무 놀랐다. 명색이 의사라면 환자의 모습이 어떠하던 간에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하게 대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였다. 나는 그의 모습을 처음보고 다른 사람들이 그러했듯이 흠칫 놀라 당황하였으며, 그것이 그에게 어떤 상처가 되는지 배려하지 못한 채 한동안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서 우둑커니 서 있었다.

비인두암.

서른 두 살의 그는 비인두암을 앓고 있는 환자였다. 진단 당시부터 수술은 할 수 없었고, 그간 여러 종류의 항암제를 써봤으나 하나같이 반응이 없었다. 담당 교수님은 더 이상의 항암치료가 의미가 없다며 서른 두 살의 그에게 임종준비를 권유하였었다.

그는 암으로 인해 몰골만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얼굴의 중심부위에 자리잡고 있던 암덩어리 때문에 신체의 각종 기능에도 이상이 있었다. 상악골의 종양이 눈을 밀고 나와,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고, 그나마 보이는 것도 사물이 두개로 맺혀 보였다. 물체가 계속 두 개로 보이니 당연히 머리가 아팠고, 때로는 메슥거리기도 했다. 암덩어리로 인해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말을 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거리는 행위로 혹은 종이에 글씨를 쓰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했다.

또 다른 문제는 식사문제였다. 사람이 원래 음식을 입에 넣으면 씹어서 삼킬 수 있어야 하는데, 암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그는 음식을 씹을 수도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되면 밥을 못 넘기는 것도 문제였지만, 그것 못지 않게 큰 문제는 침을 못 삼키는 일이었다. 병실에 누워있는 그의 턱 밑으로는 침이 줄줄 흘러 내렸고, 그것을 받아내기 위해 가제수건이 밑에 놓여 있었다. 잔인하게도 사람의 침은 참으로 질기게도 많이 나왔고, 경호씨의 안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축축하게 젖은 가제수건을 갈아야만 했다.

증상이 점점 더 심해지자 주치의 선생님은 인턴인 나에게 콧줄을 꽂으라고 지시하였다. 콧줄을 꽂으면 위장까지 연결되므로 밥은 못 먹어도 미음을 콧줄을 통해 공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너무 쉽게 넘어가는 0.5센티미터 얇은 직경을 가진 콧줄이 암덩어리에 걸려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그와 나는 몇 시간 동안 콧줄을 넣으려 병실 안에서 실랑이를 벌였으나 결국 실패했다. 방사선과의 도움을 받아 투시경을 보면서 콧줄을 삽입하려 하였으나 그의 커진 암덩어리는 그것마저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이 전혀 못 먹는 상태에서 굶길 수는 없었으므로 주치의 선생님은 혈관 주사를 통해서 영양과 수분을 공급하기로 결정하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수액주사가 워낙 고농도의 영양주사이다보니 혈관이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터져버리는 문제가 계속 발생했다.

나는 다 죽어버린 혈관을 찾느라 낑낑 대야만 했고, 주사 바늘로 여러 번 그의 팔 다리를 쑤셔댄 끝에야 혈관 주사를 놓을 수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손등이 부어올라 주사를 바꿔야만 하는 상황이 되면, 무척 힘들었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이 없이 묵묵히 수 차례의 바늘 찔림을 당하였다. 그의 부인만 무척 미안해 하며 음료수를 하나씩 내오곤 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그도 지쳤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종이에 다음에 합시다 라는 말을 힘겹게 썼다. 바쁜 인턴 생활 와중에 경호씨 하나에 몇 시간씩 매달리다 보면 다른 환자들일이 밀리는데 그러면 나는 다른 환자 일을 우선 끝내 놓고 경호씨에게 다시 오곤 했다.

그날도 그렇게 병실을 나가려고 했는데, 그 때 우연히 내 시선을 사로잡은 물건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누워지내는 경호씨가 항상 바라 볼 수 있게 벽에 붙여놓은커다란 사진이었다. 젊은 남자가 두살 남짓 되어 보이는 여자 아이를 꼭 껴안고 찍은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젊은 남자는 병을 앓기 전의 경호씨였고, 예쁘게 생긴 여자아이는 경호씨의 딸이었다.

그에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그는 참 번듯한 모습이었고, 그의 딸은 객관적으로 보기에도 참 예쁘고 귀엽게 생겼었다.

한번은 그의 어머니가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얼굴이 저렇게 변하니,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어하고 아무 말도 안 하네요. 내 자식이어서가 아니라 참 착한 아인데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다고…”

경호씨는 친구들이 병문안 온다고 해도 흉측한 자기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극구 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도 간혹 옆 환자 병문안 오는 사람들 속에 순진한 어린이들이 우연히 그의 얼굴을 보며 깜짝 놀라면서 엄마 저 아저씨는 얼굴이 왜 저래? 라고 하는 상황을 몇 번 접하다 보면, 그래서 부모도 옆 환자도 민망해 하며 미안해 하는 일을 당하며 겸언쩍어해야 하는 일을 몇 번 접하다 보면, 경호씨는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런 경호씨가 못내 만나고 싶어했던 사람은 꼭 한 사람 있었다.

우리 아이가 딸래미를 보고 싶어하는데, 딸아이가 아빠를 보면 무서워서 울고 도망을 가요그러고나서 아빠 어디갔냐고 자꾸 찾고 아빠 보고 싶다고 울어요

세상에 세상에...

경호씨는 집에 갈 형편도 못되니 딸을 볼 수도 없었지만, 경호씨는 딸아이를 병원으로 못 오게 했다. 아니 오라고 할 수가 없었던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래도 딸아이가 너무나 보고 싶어서 경호씨는 침대 바로 앞에 커다랗게 딸아이의 사진을 걸어두었다. 그리고 나서 잘 보이지도 않는 눈을 떠가면서 하루 종일 딸아이의 사진을 쳐다본다.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딸아이의 모습을 봐두고 싶은 아버지 마음에 말이다.

희귀한 암에 걸린 것도 힘이 드는데, 각종 항암치료가 듣지 않아 서른 초반에 임종 준비를 해야하는 것도 억울한데 밥을 못먹는 것도 침을 질질 흘려야만 하는 것도 내 살이 썩어가는 고약한 냄새를 맡아야 하는 것도 힘이 들텐데, 그렇게 예쁜 딸아이를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다니 딸아이가 자기를 보면 무서워서 울고 고개를 돌려 도망가 버린다니 그러면서 아빠 어디갔냐고 아빠를 찾는다니.

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와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어 보진 못하였다. 그와 나의 대화는 내가 질문을 하고 그가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다른 환자들은 으레 하게 되는 간단한 요구들도 그는 하지 않았다. 특별한 요구사항을 할 만큼 기력도 없어 체념하며 지냈던 그에게도 딸에 대한 그리움만큼은 체념할 수 없었나 보다.

그렇게 암은 한 아빠로부터 딸을 빼앗아 갔고, 한 딸로부터 아빠를 빼앗아 갔다.

신싸이몬을 그리며

레지던트들의 스케쥴은 달 별로 짜여져 있어서, 보통 달이 바뀌어 주치의가 바뀌게 된다. 새로운 달이 되면 새로운 병동에 배정이 되고, 전 주치의 선생님으로부터 환자를 인계 받게 된다.

그 때도 여느 달과 마찬가지로 새로 근무하게 될 병동에 갔었다. 인계를 받으러 간 병동에서 환자 명단을 바라보던 나의 시선은 우연히 신싸이몬 이라는 이름에 꽂혔다.

이름이 특이하네.. 외국인인가? 그런데 성은 신씨인 것 같은데.. 그럼 재미교포인가..

주치의 선생님에게 물어보니 그 이름의 주인공은 바로 신상옥 감독이었다.

우와! 영화 감독 신상옥씨요? 최은희씨 남편 말이죠?

다 알다시피 신상옥씨는 한국 영화를 이끌었던 유명한 영화 감독이다. 당시 최고의 미녀 영화배우였던 최은희씨와의 결혼으로 세간에 화재를 뿌렸었고, 사랑손님과 어머니, 상록수 같은 유명 영화를 만들었다. 한참 전성기였던 시절 북한 공작원에 의해 강제 납북되었으나 영화 같은 탈출을 하여 더욱 유명세를 탔던 분이었다. 북한에서 탈출한 후로도 한국과 미국을 오가면서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쳐 한국 영화를 한단계 끌어 올린 장본인이 바로 신상옥씨다.

그런 그가 내 환자가 되었다. 병실에는 신상옥이라는 이름 대신 신싸이몬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는데, 주민등록을 재발급 하는 과정에서 신변의 안전을 위해 안기부와 협의하에 외국에서 사용하던 이름으로 등록이 되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는 간암 환자였다. 만성간염이 있었고, 간경화와 간암이 있었다. 간암을 진단 받고, 간이식 수술을 받았었다. 하지만, 내가 인계 받을 때에는 간암이 재발하여 그에 대한 치료를 하고 있었는데, 복수가 차고 간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여 암에 대해 적극적인 치료는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병실에 처음 들어가서는 굉장히 낯익은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담당선생님이 바뀌셨나보네요?

네 이번달 부터는 주치의가 바뀌어서, 제가 담당주치의가 되었습니다. 전 주치의였던 권선생님한테 환자분 상태에 대해서는 자세히 이야기 들었습니다.

선생님 나 잘 봐주세요.

그럼요. 별 걱정을 다하시네요.

팔순을 바라보는 노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을, 나는 그냥 자기 몸이 걱정이 되어서 하는 소리로 받아들였다.

걱정이 아니라, 내가 죽기 전에 꼭 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래요. 선생님은 영화 좋아하세요? 내가 평생을 꿈꿔온 일이 있는데, 바로 영화 사관학교를 만드는 일이에요. 그래서 젊은 친구들을 교육시키고, 나 같은 나이든 사람들이 젊은 친구들에게 경험을 이야기 해주고 노하우를 전수해주는 학교를 만들꺼에요. 우리 한국영화도 이제는 세계 어디에다가 내놔도 손색이 없어요. 우리도 외국 애들처럼 아카데미상 같은 거 못 받을 이유가 없다구. 그러려면 세계 최고의 영화 학교를 만들어서 후배들을 키워야 해요. 얼마 전에는 학교 세울 땅을 보러 다니다가 무리를 해서 입원해 있는데, 그거 다 하기 전에 나는 못 죽어요.

팔순을 바라보는 간암 말기 환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흔히 큰 병을 진단 받거나 죽음을 앞둔 상태에서는 자신의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어서 현재의 자기 상황을 부정하게 된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현실을 부정하면 마음은 약간 편해지는데, 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흐르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의 삶을 의미있게 만드려는 행동을 하게 된다. 그것을 정신과적 용어로는 승화라고 한다.

죽음을 앞두고도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정의 단계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승화의 단계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의 꿈이었다.

영화는 내가 살아가는 이유에요.

하루하루 병원 생활에 지쳐가며 목적의식 없이 다람쥐 챗바퀴 도는 삶을 살던 이십대 후반의 나에게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칠순 노인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아니 충격이라기 보다는 준엄한 꾸짖음 같았다. 살날이 얼마 안 남은 나는 이렇게 열심히 남은 삶을 불태우며 살아가고 있는데, 앞날이 구만리 같은 너는 뭐하며 살아가느냐는 꾸짖음 말이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서는 열정이 있었고, 일에 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었다. 나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삶은 그렇게 많이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절박하게 다가오고, 많이 남은 사람에게는 짐스럽게 다가오나 보다. 지금은 소천하였지만, 그의 바램은 오늘도 후배 영화인들을 통해 계속 이어지리라 믿는다.

불량품

범석아! 물어볼게 있는데, 항문암이 예후가 나쁜 편이니?

의국에 있는데, 동기녀석이 와서 난데없이 항문암에 대해 물었다.

항문암의 경우 국소 진행성이라도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만으로도 완치 되기도 하는데 ? 아는 분이 항문암에 걸리셨니?

우리 어머니 다니는 교회에 아시는 분의 며느리가 이번에 항문암을 진단 받았나봐.

환자분 나이는 많아?

이제 결혼한지 2년 밖에 안되었대.

저런 젊은 사람이 항문암이라니…”

그러고 보면 세상에는 젊은 암환자들도 참 많다. 요즘 세상에서는 워낙 암이 많아 젊은 사람이나 나이든 사람이나 할 것 없이 암조심 할 일이다.

그런데, 범석아. 암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그런 것도 알 수 있는 거니?

에이 그런걸 어떻게 알아. 이론적으로야 Doubling time을 알면 거꾸로 유추해 볼 수는 있겠지만, 정확히 알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없지.

그래도 왜 그런거 있쟎아. 암이 2년 전에도 있었을까?

2년 전?

내 친구는 자기 어머니의 친구분이 궁금해 하는 것을 나에게 물어 보았는데, 한참 듣다 보니 느낌이 조금 이상했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어떤 선생님한테 진료를 받는 것이 좋으냐, 항문암의 치료는 어떻게 해야하냐, 이 병의 예후는 어떠냐 그런 것들을 물어보는데, 어머니의 친구분이 궁금해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다. 진짜 궁금해 하는 것은 이 병이 언제부터 생겼냐 하는 것이었고, 더 정확하게는 2년 전에도 암이 있었을까 하는 것이었다. 2년 전에 결혼을 했는데, 며느리가 덜컥 암에 걸리니 결혼 하기 전부터 병이 있었던 것을 숨기고 결혼했던 것 아니었냐 시어머니는 그게 궁금했었던 것이었다. 옆에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내 친구가 한마디 거들었다.

그러니까 불량품을 시집보낸 거 아니냐는 이야기네

그제서야 사태파악이 된 나는 아연실색했다. 그 시어머니의 태도는 젊은 며느리가 암에 걸렸으니 너무 안스럽고, 어떻게 해서든 살려보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년이 어디 몹쓸 병을 숨기고 시집와서 누구네 집 귀한 아들 신세 망치려고 작당을 했나 보다 였다. 세상에 자 붙은 인간 족속머리들이란 그런 것일까.

시어머니라는 사람의 그런 무식한 발상에 나는 놀라 등골이 쭈뼜섰다. 자가 붙어 있어도 어머니는 어머니인데, 큰병 걸려 힘들어 하는 사람에게 어머니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것이 궁금할 수 있을까. 만일 며느리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서글플까.

사람은 물건이 아니다. 물건은 고장 나면 AS도 받고, 고쳐 쓰다가 안되면 버리기도 한다. 만일 물건이 불량품이면 반품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사람은 병들었으니 AS하고 반품할 수 있는 그런 물건이 아니다.

아마도 그 시어머니는 병든 며느리를 반품 하고 싶었나 보다. 그러려면 시댁에서 사용도중 고장 난 것이 아닌, 처음 살 때부터 불량품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 시어머니는 집요하게 자꾸만 2년 전에도 암이 있었느냐를 물어보았던 것이었다.

신성한 결혼을 통해 말로는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고 하면서도, 가족에게 힘들 일이 생기면 상대방 탓을 하며 빠져나갈 궁리만 하는 비겁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대게 의무는 지지 않고 권리만 누리면서, 남 탓하기만 좋아한다. 그러면서 자기 자신은 무엇이 잘못인지 알지 못하며, 자신은 고결한 척 한다. 무엇보다도 그렇게 반품하는 것이 자기 아들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하고 다닐 것을 생각하면 나는 무척 화가 난다.

그런 시어머니 코를 납작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며느리는 꼭 완치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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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고시에 합격한 아들의 췌장암

진료실에서만난환자 : 2008/05/05 14:39

사법고시에 합격한 아들의 췌장암

스물 일곱. 그는 내가 보았던 가장 젊은 췌장암 환자였다.

모든 암환자가 다 마찬가지겠지만, 그가 처음부터 췌장암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평소 간간히 배가 아프긴 하였지만, 스물 일곱이라는 나이에서 알 수 있듯이, 워낙 건강했었던 지라 그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병원을 찾지 았았었다.

그러다가 어느날 어이쿠 하고 아프기 시작하는데, 도저히 안 되겠어서 집근처에 있는 B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응급실에서는 급성장염, 장 마비증 이라는 진단이 내려져서 몇 시간 수액주사를 맞은 뒤 귀가조치 되었다. 괜찮겠거려니 했었는데 집에 와서도 다시 배가 아프기 시작하자 그는 다시 B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이번에는 장중첩증이라는 진단이 내려져서 입원을 하였다. 갑자기 복통이 심해지자, 이번에는 장중첩증에 의한 장폐색 및 장간막괴사라는 진단이 덧붙여져서, 수술장에 들어갔다. 수술장에서 장폐색을 풀어주는 수술을 받다가 이번에는 췌장에 덩어리가 발견되었고 최종적으로 췌장암을 진단 받았다.

췌장암이라는 것이 50대 이후에서 잘 생기는 병이고, 젊은 사람에게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병이다 보니, 의료진도 처음부터 췌장암의 가능성은 전혀 염두해 두지 않았던 것이 당연했다.

수술장 소견으로는 췌장암이 복막에 전이되었고, 그것으로 인해 장이 심하게 늘어 붙으면서 배가 아픈 것이었다. 암이 이미 복강 내로 퍼져 있었으므로 사실상 완치는 물 건너간 상태였다. 이미 다 퍼져있었으므로 췌장의 덩어리를 절제하는 수술은 의미가 없었고, 막혀있는 장만 잘라낸 채 그냥 수술은 마무리 되었다.

장중첩증이라고 해서 수술장에 들어간 아들에게 췌장암 4기라는 진단이 붙여지자, 환자의 아버지는 그 병원을 더 이상 못 믿겠 던지, 그 길로 배에 상처도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다짜고짜 서울대병원으로 찾아왔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일인지라 여기 저기에 빽을 동원하여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시켰었던 듯 싶었다.

아버지는 나를 붙잡고 이것 저것 물었다. 내가 어떤 대답을 해주던 간에 이미 다른 병원에서 오진이라는 불쾌한 경험을 해야만 했던 그로서는 의료진을 쉽게 믿지 못하였다. 그는 나에게 늘 꼬치 꼬치 물었다. 때로는 말투가 너무나 공격적이어서 나는 취조 당하는 느낌을 받기도 하였고, 나로서도 그와의 면담은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젊은 아들이 불치병에 걸려서 그런 것이려니 하고 이해하고 넘어갔지만, 그의 언행에서는 너무나 비장함이 느껴지곤 하였다. 그는 무척 예민해져 있었고, 무엇이든 두번 세번씩 물어보고 확인받으려 했다.

선생님 그래도 1%라도 완치될 수는 있는 거겠지요? 뭐라고 대답 좀 해주세요. ?

아니요. 이병 완치 안 되요. 췌장암은 원래 예후가 제일 나쁜 병이에요.

완치가 안되더라도 오래 살 수는 있는 거지요? ?

그러고 다음날이면 같은 질문을 또다시 했다.

선생님 우리 아이 완치가 될 수는 있는 거겠지요?

아니요. 이병으로 죽는다구요.

그렇게 며칠을 같은 대답을 하며 옥신각신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지곤 하였다. 그는 아직도 아들의 병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에게 이제 그만 아들의 병 상태에 대해 받아들이라고 강요를 하고 있었고, 그런 나를 애써 외면한 채 그 역시 그만의 세계에서 희망의 나래를 접지 않고 있었다.

담당 교수님 역시 회진 오셔서 별다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허 참 27살인데 췌장암이란 말이지 이미 복강내로 다 퍼졌고 말이야 아주 드물게 가족력이 있는 췌장암에서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서 발생할 수도 있긴 하거든. 가족력이 있는지 좀 확인해 보게. 그리고 항암치료는 권해보되 너무 억지로 권하지는 말게. 항암치료로 재미를 보는 경우가 별로 없어서 말이야

그러던 어느 날 밤 늦은 시간에 의무기록을 정리하고 있는데, 스테이션에 그가 들이 닥쳤다.

선생님. 잠깐 나하고 이야기 좀 합시다.

한눈에 보아도 얼굴이 붉게 상기된 것이 거나하게 소주 한잔 하셨던 모양이었다. 또 다시 나와 언쟁 아닌 언쟁을 벌일 태세인가 싶어 긴장을 했는데, 의자에 풀썩 주저 앉더니 의외로 너무나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우리 아이가 얼마 전에 사법고시에 합격하였습니다. 중학교 때 애 엄마 유방암으로 먼저 저 세상 보내 놓고, 이 녀석 하나 잘 키워 보려고, 참 아둥바둥 했었습니다. 그래도 엄마 없이도 참 착하고 씩씩하게 잘 자라주었던 녀석이었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도 이런 생 날벼락인지 과외한번 못시켜주었는데도, 늘 반에서 1등이었고, 말썽한번 부려본적이 없었던 녀석이에요... 서울대학교 합격했을 때에도 사법고시 합격했을 때도 애 엄마 사진 놓고서 많이 울었었는데, 내 오늘도 애 엄마 사진 놓고서 또 많이 울었습니다 연수원에 들어간다고 아버지 이제 고생 안해도 된다고 좋아했던 녀석이었는데

아버지는 굵은 눈물방울을 연신 쏟아냈다. 머리가 하얀 50대 남자의 눈에서 나오던 그 굵은 눈물은 아들에 대한 연민이자 그의 굴곡 많은 인생이었다.

저 녀석은 제 인생의 전부입니다. 선생님 제발 살려 주세요 내 애 엄마 한테도 이야기 했어요. 제발 데려가지 말라구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의 손을 꼭 잡고, 그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말없이 흐르는 눈물만 내 손등위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났고, 그가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미안했을까. 그간 나에게 공격적인 언행을 보였던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아들을 잘 지켜내지 못해 아내에게 미안한 것인지, 이제 막 법관으로서 꽃을 피우려는 아들에 대한 미안함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요?

또다시 한참의 침묵이 흘렀다.

항암치료 한번 해 보실래요?

항암치료를 전공하는 종양내과 의사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늘 이말 뿐이다. 나도 때로는 이런 내가 참 답답하게 느껴진다. 항암치료만 받으면 완치되고 싹 좋아질 거에요 이런 말만 하면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은 늘 반대이다. 그래도 항암치료라도 할 것이 남아 있음에 위안 삼으며 버틸 뿐이다.

다음날 그는 아들에게 항암치료를 받게 하기로 결정하였다.

항암제가 들을 확률 15% 정도 이구요, 지금은 완치를 바라보고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더 이세상에 있게 해드리려고 항암치료 하는 거에요. 치료의 목적은 분명히 이해해 두시구요, 생길 수 있는 부작용에는..

나의 지리한 설명이 계속되자 못내 답답했는지 그는 건성으로 예 예 알았습니다. 만 되풀이 하였다. 그러다가 차마 더 설명을 못 듣겠던지

그러니까 여기다 싸인만 하면 되는 거지요?

하더니 훌쩍 싸인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는데요.

?

아니.. 아닙니다. 오후에 약이 올라오는 대로 바로 항암치료 시작할께요.

나는 그에게 정자보관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가 얼른 말을 주워 담았다. 젊은 남자가 항암치료를 시작하기 전에는 정자보관을 해 놓는 경우가 있는데, 순간 스쳐지나가는 생각에 그의 경우에는 정자보관을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완치가 안 되는 것이 뻔한 상태에서 저 세상으로 먼저 간 아들의 정자가 이 세상에 남아 있다 한들 그것이 아버지 마음에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렇게 그는 첫번째 항암치료를 끝냈다. 그리고 며칠 뒤 그와 그의 아들은 두 손을 꼭 잡고 병원문을 나섰다. 그 이후로 그의 소식을 듣지 못하였다. 챠트를 열어보았으나 두 부자는 그 이후로 다시 서울대병원에 오지 않았다. 가만히 있을 아버지가 아니었기에 아마도 전국의 용하다는 민간요법을 다 찾아 다니며, 몸에 좋다는 것을 다 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디에선가 조용히 생을 마감하지 않을까 싶다. 스물일곱의 꽃다운 나이라고 해서, 특별히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고 해서 저승사자가 늦게 오거나 사정을 봐주진 않기 때문이다. 나는 다만 아들이 저승에서 어머니를 만나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랄 뿐이고, 남겨진 아버지가 슬픔을 잘 극복해 나가길 바랄 뿐이다.

Posted by 김범석 bhum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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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속의 아이와 암덩어리 (2)

진료실에서만난환자 : 2008/05/03 09:59

배속의 아이와 암덩어리 (2)

항암치료를 합시다.

그녀는 울었다. 그녀의 남편도 울었다. 그녀의 엄마도 울었다. 아마 뱃속의 아이도 울었을 것이다. 늦게 임신이 되었다고 좋아하던 34살 그녀의 가녀린 몸으로는 이 현실을 감당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한참을 울고 나서 고개를 들어보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선택을 종용하는 흰 가운 입은 의사가 있을 뿐이었다.

다음주에 다시 와서 정하실래요? 제 생각에는

선생님.. 다음주에 다시 올께요. 시간을 좀 주세요.

그녀와 그녀의 네 가족은 다음주에 오지 않았다. 그 다음주가 되어도 오지 않았다. 그녀는 선택을 한 것이었다.

결국 피고름이 나고 통증이 심해져서야 그녀는 다시 병원에 왔다. 그녀의 유방은 점점 부풀어 올랐다. 나는 유방암을 치료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의 속도로 자라는지를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면서 배워야만 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임신후반부에 누구나 먹어야 하는 철분약을 처방해 주는 일 밖에 없었다. 암환자는 진료비의 10%만 내면 되어서 내가 철분약을 처방해 주면 처방전 없이 약국에서 사는 것 보다 몇 천원을 아낄 수 있었다. 괜찮다는 그녀에게 나는 꼬박꼬박 철분약을 처방해 주었다. 그것이라도 안 해주면 내가 못 견딜 것 같았다.

그녀는 끝끝내 항암치료를 거부하였다. 통증이 심했을 텐데도 그녀는 진통제도 거부했다. 그것이 배속의 아이를 지켜내기 위해 그녀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선택이었다. 매일 매일 조금씩 자라나는 가슴의 멍우리를 만지면서 그녀는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매일 매일 유방이 아파서 울었을 것이고, 매일 매일 암세포가 자라나는 것을 지켜봐야 해서 울었을 것이다. 매일 매일 자신의 죽음이 다가오고 있어서 울었을 것이고, 매일 매일 아이가 자라나는 것을 느끼면서 울었을 것이다. 태어나서 엄마 얼굴도 기억 못하고 자랄 아이를 생각하며 울었고, 책임지지도 못할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에 또 울었을 것이다.

신의 침묵.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은 스스로 부여해준 생명에게 끝까지 냉정했다. 살기 위해서 바둥거리는 인간의 의지가 이렇게 가혹하게 조롱받아도 되는 것인지 나는 무서웠다.

그녀는 3kg의 건강한 딸아이를 출산하였다. 결국 아이는 엄마의 생명을 담보로 태어났다. 슬프게도 아이는 무척 예뻤다.

출산 후 본격적인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남들은 산후조리 하느라 누워지낼 시기에 그녀는 항암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들락거렸다. 항암치료 시작하기 직전에 한 CT검사와 뼈스캔 검사에서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알 수 없는 간 전이소견이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항암치료는 잘 듣지 않았다. 타이밍이 너무 늦었다. 다른 약으로 바꾸어 보아도 끝내 잘 듣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을 항암치료 받다가 그녀는 운명을 달리했다. 아이는 태어나서 엄마를 잃었고, 아빠는 아내를 잃었다. 그것은 그녀의 선택이었다. 엄마는 자기의 생명대신 아이의 생명을 선택했다.

그것이 정말로 옳은 선택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임신 5개월이던 그때에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생명을 지우고 그것을 담보로 엄마의 생명을 얻어서 우선 엄마부터 살리고 다음에 아이와 만날 것을 기약했어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뿐이다.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그 아이가 커서 엄마 잡아먹은 아이라는 소리를 안 들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가지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아이가 커서 엄마 얼굴을 닮지 않고 아빠 얼굴을 닮았으면 좋겠다. 아이가 엄마얼굴을 쏙 빼 닮는다면 아이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때 그 기억에 무척이나 슬플 것 같다.

Posted by 김범석 bhum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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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속의 아이와 암덩어리 (1)

진료실에서만난환자 : 2008/05/03 09:58

배속의 아이와 암덩어리

간혹 신은 인간을 가지고 장난을 친다. 절대자인 신은 당신이 만든 피조물들을 가혹하게 만들면서 쾌감을 느끼는지, 한 인간의 운명을 그리도 기구하게 만들어 놓고 나서야 장난을 멈추곤 한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없이 말이다.

그녀의 경우가 그랬다.

임신을 하면 호르몬 변화가 와서 유방이 크고 단단해 진다. 유방이 뭉치기도 하는데 젖몸살이라 하여 잘 마사지 해주면 풀리기도 한다. 그녀도 그랬다. 유방이 단단해지고 아프길래 임신을 하면 원래 그런 것이려니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녀의 친정어머니만 그런 그녀를 안스럽게 여기고 어쩔 바를 몰라 했다. 친정어머니는 딸의 가슴을 정성스럽게 마사지 해주었다. 애기가 안 들어선다고 시댁에서 눈치 보며 지내다가 어렵게 임신을 한 34살의 딸. 자기보다 일곱 여덟살은 어린 산모들과 함께 산부인과를 다닐 때에도 친정어머니는 꼭 딸과 함께 병원에 가곤 하였다. 내 새끼가 새끼 낳는데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냐며 어머니는 무척 정성을 다하셨다. 그런 어머니의 정성으로 그녀는 결국 젖꼭지에서 피가 나오고 나서야 병원을 찾았다.

유방암입니다. 임파절에까지 많이 번진 것 같아요. 서울의 큰 병원에 가보세요.

서른 넷의 나이. 임신 5개월. 그리고 유방암.

그녀와 그녀의 남편, 그녀의 어머니 그리고 뱃속의 아이까지 네 식구는 당장 서울의 큰 병원으로 달음질 쳐왔다. 다시 조직검사를 해봐도 분명 유방암은 맞았다. 암세포들은 이미 피부 바로 아래까지 쳐들어와서 유방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초음파 검사에서는 목에 있는 임파절에까지 전이가 있었다. 임신 때문에 CT검사, 뼈스캔검사를 할 수도 없어 정확히 병이 어디까지 번졌는지 확실히 알 수도 없었다.

확실한 것은 유방암이라는 것. 뱃속에는 아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무언가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삶은 가혹하게도 우리에게 어려운 선택을 강요한다. 그 선택 속에서 좌절하고 원망해봐야 남는 것은 없다. 오직 선택만이 우리 앞에 자리잡고 있다. 어서 선택해봐라 내 그 결과를 보여주지 하며 신은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우리 앞에 있었다.

아이를 희생하여 엄마를 살릴지 엄마를 희생하여 아이를 살릴지 우리는 정해야만 했다. 전생에 이 모자는 무슨 기구한 인연이었길래 한 명이 목숨을 내 놓아야 다른 한 명이 살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던가. 기구하다는 말로는 밖에 표현하지 못함은 표현력이 짧아서가 아니라 이들 모자 앞에 놓여진 운명의 신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리고 싶지 않아서였다. 기구하다며 운명의 신을 탓하면 왠지 신을 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결국 나를 포함한 의료진은 고심 끝에 항암치료를 권유 하였다. 염증성 유방암에 목에 있는 임파절에까지 번져서 수술은 도움이 안될 것으로 판단했다. 항암치료는 최대한 태아에게 피해가 안 가게끔 약하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더라도 태아에게 피해가 100% 안 가지는 않을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리 약한 항암치료라고 하더라도 항암제가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는 알 수 없다가 맞는 말이다. 학계에 보고된 몇몇 사례들을 보면 임신 중에 항암치료를 해도 태아에 큰 문제가 없었다더라 하고 그녀에게 말을 하였다. 거짓말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아주 정직한 말도 아니었다. 항암제라는 것 자체가 원래 빨리 분열하는 세포를 공격하도록 만들어 진 것 아니던가.

그녀의 몸에는 빨리 자라나는 생명이 두 개가 있었다. 유방암도 빨리 자랐고, 뱃속의 아이도 빨리 자랐다. 항암제가 태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의사들이 아무리 괜찮다 말을 해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을 것이다. 그녀는 뱃속 아이의 엄마이니까.

Posted by 김범석 bhum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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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진료실에서 본 환자 이야기

진료실에서만난환자 : 2008/05/03 09:56

안녕하십니까 김범석입니다.

블로그를 연재를 중단하고잠시 쉬었습니다.

그 사이에 책도 출판되었고,

메일과 쪽지도 많이 받았습니다.

나름 (?) 애독자도 생겼고,

책을 잘 읽었다며 감사의 말을 들으니

오히려 제가 감사했습니다.

블로그를 어떻게 운영할까 고민을 했었는데,

이제는항암치료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환자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가 진료실에서 바라보았던 환자들의 이야기, 짧은 순간이나마

제가 바라보았던 그들의 인생이야기들 입니다.

이런이야기들을 통해 단 한명이라도 오늘의 우리를 되돌아보고,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데 조금이라도 힘을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제가 글을 쓰는 이유일 것입니다.

힘든 현실 속에서도 하루 하루 용기 잃지 않기를

그리하여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의미를 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김범석드림

Posted by 김범석 bhums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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