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위 있게 죽고 싶다.
품위 있게 죽고 싶다
그는 70세의 폐암 환자였다. 진단 받을 때부터 간과 뼈에 커다란 전이가 있었다. 전이가 있는 4기이기 때문에 수술은 불가능했고, 완치를 바라보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환자 본인과 가족들은 환자분의 상황에 대해 충분히 이해하였고, 생명연장과 증상완화의 목적으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평생 교직에 있었다는 환자분은 항암치료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고, 의료진에 매우 협조적이었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항암치료는 비교적 잘 견뎠다. 항암치료 시작 후 줄어들기 시작했던 암 덩어리는 항암제에 금새 내성이 생겨서 얼마 가지 않아 다시 커지기 시작했다. 이후 두번째 항암제로 바꾸었으나 그마저도 잘 듣지 않았다. 응급실을 통해 입원 했던 것은 세번째 항암제를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
그는 숨이 차서 응급실로 왔고, 가슴 X-ray에는 양쪽 폐에 떡하니 폐렴 소견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생기는 세균성 폐렴과는 완연히 다른 양상이었고, 젬자라는 항암제로 인해 생긴 약인성폐렴이 의심되었다.
환자의 호흡수는 40회가 넘었고, 산소를 최대한으로 공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소 수치는 70%를 넘지 못하고 있었다. 게다가 환자의 의식은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지금 당장 인공호흡기를 달지 않으면 숨을 쉬지 못해 몇시간 안에 돌아가실 것이 뻔했다. 가족들을 불러모아 상황을 설명 드렸다.
“상황이 매우 안 좋은데요, 중환자실 갈지 말지를 지금 정해야 할 것 같아요. 환자분은 워낙 폐암이 있었던 데다가 지금 양쪽 폐에 폐렴이 오면서 갑자기 호흡곤란이 생겼어요. 문제는 폐가 기능을 못해 산소교환이 안 되는 점이에요. 사람이 숨을 못 쉬면 바로 죽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당장 인공호흡기를 달지 못하면 오늘을 못 넘기고 돌아가실 것 같아요. 그런데, 인공호흡기를 단다고 해서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다고 장담하진 못해요. 또 설령 이번 고비를 넘긴다고 하더라도 이미 암이 진행된 상태여서 얼마나 더 사실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어요. 그간 환자분이 항암치료에 잘 듣지 않았던 편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래요. 여기에서부터는 정답이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가족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의견을 듣고, 중환자실 갈지 말지를 정했으면 합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치료를 받았던 보호자들은 망연자실했고, 어찌할 바를 몰라했다. 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될 수 있냐며 따지는 보호자도 있었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냐며 나에게 되묻는 보호자도 있었다. 환자에 대해 유난히 극진했던 보호자들은 결국 할 수 있는 모든 치료를 다 해달라며 중환자실 행을 택했다.
그 길로 환자분은 인공호흡기를 단 채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았다. 온갖 항생제와 약병들이 주렁주렁 매달렸음에도 불구하고, 폐렴은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인공호흡기를 매달고 2주가 지나자 기관절제술을 받아야 했고, 인공호흡기로 인한 새로운 폐렴도 생겼으며, 콧줄에서는 간간히 위장출혈 소견을 보이기 시작했다. 가족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의식 없이 누워있는 환자분에게 면회를 와서 조용히 울다 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급기야 심장 정지가 왔고 1시간이 넘는 심폐소생술을 했지만 환자분은 돌아가셨다. 인공호흡기로 인해 목에는 구멍이 뚫리고, 팔다리에는 정맥주사 자국이 낭자하고, 심폐소생술하며 갈비뼈는 죄다 부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환자분은 임종을 맞이 할 수 있었다. 그것도 가족들이 지켜보지도 못하는 가운데서…
지금의 시점에서 되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그때 중환자실에 가도록 한 결정이 잘 한 결정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오히려 응급실에 왔었을 때 그때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하도록 해드렸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머리 속에 계속 맴돌았다. 만일 사후세계라는 것이 있어서 그 환자분의 영혼을 만날 수 있었다면, 아마도 고맙다는 이야기는 못 들었을 것 같다.
중환자실에서 있었던 2주가 넘는 시간들. 누구를 위한 생명 연장이었으며, 그렇게 해서 연장된 시간이 과연 환자분과 가족들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였던가.
그것이 환자분에게 어떤 고통을 초래하는 지와 상관 없이 어떠한 치료라도 다 하는 것이 자식 된 도리라는 가족의 시각. 그리고 죽음을 치료의 실패로 바라보는 의료진의 시각. 여기에 할 만큼 해놔야 나중에 소송 걸리지 않는다는 ‘방어진료’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나중에 환자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보호자들이라는 ‘진료 편의주의’. 이런 것들이 맞물리며, 편안하게 임종을 맞이해야 할 환자분들이 고통 속에서 임종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병원에서는 생사의 기로에 선 환자들을 놓고 비슷한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점은 그렇게 환자 본인의 생사를 다루는데, 정작 환자 본인의 의지는 다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의 생명을 연장해 보겠다는데, 막상 그 사람은 연장되는 본인의 삶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우리는 왜 고민하지 않고 있을까? 의료진이나 보호자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 환자 분들에게 생명연장이라는 포장에 쌓여진 고통만 드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